세계 전쟁사를 일별하면 평화의지는 전쟁의지 앞에 무력하다. 1938년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국민에게 독일에서 체결한 뮌헨협정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하고 "집에 돌아가 편안하게 주무시라"고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떼어주는 대신 독일 나치 정권의 영토 팽창주의를 종식시켰다는 평화외교의 업적을 자랑한 것이다. 하지만 1년 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해 2차세계대전의 막을 올렸다.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전세계가 전쟁의 기압골에 갇혔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미국·나토회원국에 맞서 러시아는 중국·북한과의 협력 강화로 맞섰다. 러시아의 전쟁외교는 다극화 전략으로 미국의 주도권을 제한하는데 집중했다. 약화된 미국 일극체제의 허점을 파고든 셈이다. 그 중심에 핵보유국 북한이 있었고, 이는 대한민국 안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국내외 경고가 잇따랐다.
경고는 현실이 됐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개최된 북-러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김정은에게 북한의 무기고 개방을 요청했다. 김정은은 그 대가로 정찰위성, 핵탄두 소형화, 핵잠수함, 대륙간탄도미사일 대기권 재진입 기술 이전을 요구했을 것이란 관측이 유력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안돼 지난 19일 열린 평양 북-러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조약 4조가 위협적이다. '북한과 러시아가 무력침공을 받으면 양국은 지체 없이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했다. 러시아 정부가 1996년 대한민국의 경제원조에 대한 대가로 폐기했던 조·소동맹의 사실상 부활로 봐도 무방하다.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이 맞서는 한반도 정전상태에 북한과 동맹급 관계로 러시아가 등장한 것이다. 남북을 맺은 동맹급 당사국 중 합법적인 핵무장국인 미·중·러와 불법적 핵무장국인 북한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은 유일한 비핵국가이다. 미국의 핵우산은 북한 핵무장이 고도화될수록 작동이 불확실해진다. 핵무력 역학상 한반도 냉전외교에서 대한민국의 '말발'은 점점 약해질 일만 남았다.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라는 강수를 둬도, 푸틴은 상응한 보복 조치로 으름장을 놓는다.
국가와 체제를 위협하는 위기 앞에서도 내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는 무감각 정치라니 등골이 서늘하다. 전쟁 억지 의지와 수단이 없는 평화의지는 공허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