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인기 ‘홍콩 느와르’ 꽃 피운 두기봉 감독
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서 한국 팬 만나
자신의 최고 영화·캐릭터 질문에 “아직 없어”
스스로 향한 높은 잣대, 영화 향한 무한한 애정
삼합회, 남자들의 우정, 그리고 화려한 액션. 한때 홍콩 영화를 대표하던 클리셰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동아시아 시네마 역사의 한편에 자리 잡았다. 한국 관객에게 친숙한 ‘독전(2018)’, ‘감시자들(2013)’은 각각 홍콩 영화 ‘마약전쟁(2014)’, ‘천공의 눈(2007)’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여전히 변주되는 이런 홍콩 느와르 장르를 꽃 피운 주인공은 다름 아닌 두기봉 감독이다. 그는 지난 1996년 영화 제작사 ‘밀키웨이 이미지’를 설립하고서, 밀레니엄 시대의 홍콩을 대표하는 무수한 느와르·무협·코미디 장르 등 상업 영화를 만들어왔다.
현재도 차기작을 찍고 있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 중인 두기봉 감독. 그런 그가 잠시 메가폰을 내려놓고 한국을 찾았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의 마스터 클래스 ‘장르가 두기봉을 만났을 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관객과의 대화를 앞두고 있던 두기봉 감독을 지난 5일 부천시청에서 만나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 만든지 5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즐겨
“10여 년 정도는 더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웃음
BIFAN 주요 화두 ‘AI 활용’ 담담하게 분석
“도움 받아 제작 과정 단축할 수는 있으나…”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사실 제 영화에서 가장 유독 기억에 남거나 굉장히 인상 깊은 영화, 캐릭터를 꼽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만족스러운 작품이 없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앞서 10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선보여 온 두기봉 감독은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인 듯 보였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영화, 제일 기억에 남는 캐릭터, 최고로 치는 한국 작품’처럼 최상급 표현이 붙은 질문을 받을 때면 난처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 존경을 표해왔던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를 언급할 때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스스로를 향해 들이미는 높은 잣대는 영화를 향한 무한한 애정에서 뻗어왔다. 그는 “이제 나이가 젊은 나이가 아니기에 잘해야 한다”며 “이 업계에 들어온 지 50년 가까이 됐는데 여전히 즐기고 있다. 내년이면 나이가 70살인데, 그럼에도 아마 한 10여 년 정도는 더 영화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웃어 보였다.
영화를 향한 변치 않는 그의 열정과 달리, 홍콩 영화계를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은 변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의 홍콩과 현재의 홍콩은 천지 차이다. 1997년 ‘홍콩 반환’을 거쳐, 현재는 중국의 일국양제도 거세게 흔들리는 중이다. 홍콩식 느와르의 배경이 된 네온사인이 반짝이던 도심 풍경도 예전 같지 않다.
그는 “지금의 홍콩은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편, ‘선택지’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촬영 쪽은 예산과 촬영지도 많아졌지만, 홍콩 내에서 생산하는 100% 홍콩산 영화는 적어졌다. 양적으로도 그렇고 예산상으로도 그렇다”고 조심스레 짚었다.
이어서 “전성기의 홍콩 영화는 남성적인 영화인 동시에 우정과 흑사회 활동에 관심을 뒀었다”며 “영화는 (동시대의) 관객이 원하는 것을 충족할 때 흥행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당시 관객들이 좋아하는 홍콩의 느와르와 우정에 관한 영화를 많이 촬영했던 것”이라고 떠올렸다.
시대 흐름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담담하게 분석하던 두기봉 감독은 올해 BIFAN의 주요 화두인 AI 활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아주 많은 기술을 융합해가며 영화는 발전해왔다”면서도 “AI의 도움을 받아 영화 제작의 프로세스를 단축할 수는 있으나, AI가 인간의 뇌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계에 뛰어든 지도 어언 50여 년. 두기봉 감독은 거장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하며 적당히 만족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좋은 영화’를 골몰하고, 변함없이 현장에 두 발을 붙이고 묵묵히 서 있고 싶어 했다.
“(오늘 상영하는) ‘용호방(2004)’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향을 받았어요. 파이팅을 외치는 분위기인 영화인데, 이런 정신을 관객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촬영했습니다. 저는 영화는 책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나도 책이 재밌으면 계속 팔리듯,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거든요. 저는 아직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