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했던 시절 후학들 방패가 돼줘
과학에 기반 않는 삶은 공허 강조
생명윤리학회 창립, 복제기술 경종
깊고 귀한 품 가시고나서 더 선연
선생은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계신 분이었다. 중학생때 6·25전쟁이 나서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석달을 살아본 이야기라든지 1·4 후퇴 때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하다가 길이 막혀 유성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땅을 사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던 이야기처럼 선생의 개인사도 재미있었지만, 저명한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을 만나 감격에 겨워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라든가 영국에서 알고 지내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을 서울 인사동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이야기라든가 선생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정규 교육과정에서 선생께 배운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일로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러셀의 말도 선생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또 올해는 한자로 '내년(來年)'인데 왜 이해를 올해라고 하는지는 물어서 알았다. 선생은 "올해의 올은 '오다'는 뜻이 아니라 '이르다'는 뜻이다. 올벼의 올이 그런 것처럼"이라고 가르쳐주셨다.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묘소를 먼저 보고, 나중에 트리어의 생가를 방문하는 식으로 마르크스의 삶을 역순으로 만난 경험이라든지, 조지프 니덤과 그의 학생 루궤이전(魯桂珍)의 로맨스라든지, 니덤과 토머스 쿤을 여러 차례 한국으로 초청했으나 끝내 오지 않은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된 사연이라든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방면에 걸친 학문 역정만큼이나 선생은 평생 전 세계를 여행하셨는데 그중 몇 번은 나도 함께 하는 행운을 누렸다. 선생을 모시고 중국과 유럽을 여행한 일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함께 여행한 일행들은 선생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선생은 뭔가 잘못된 것을 보면 일일이 지적하셨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내장에 선생이 한림대 전 교수라고 표기된 걸 보시고 '전 교수'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시는가 하면, 60돌은 예순 돌로 고쳐야 한다고 바로 잡아주셨다. 당신 스스로 영어를 누구보다 잘 구사하셨지만, 영어식으로 표현된 글을 보면 왜 우리말을 놔두고 외국어를 쓰느냐며 질책하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 선생은 영어뿐 아니라 불어, 독일어, 노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하셨지만 우리 말을 각별히 사랑하신 분이셨다.
언젠가 선생은, 당신은 철학과 역사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주된 관심은 어디까지나 과학이며, 과학 없이는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없다고 강조하신 적이 있다. 선생은 과학철학자로서 과학에 기반하지 않으면 삶이 공허해진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셨지만 과학에는 반드시 윤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1998년 선생이 한국생명윤리학회의 창립을 주도한 까닭도 무분별한 생명복제 기술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진정한 세계인이셨다.
이제 선생은 선생께서 원하시던 세상으로 가셨다. 그곳이 피타고라스의 세계인지 탈레스의 세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선생은 그곳에서도 철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역사가로서 이야기를 나누실 것이다. 선생이 그립다. 아직도 선생의 따뜻한 손길을 잊을 수 없다. 선생이 내어 주셨던 품이 얼마나 깊고 귀한 것이었는지 가시고 나서 더욱 선연하다. 선생은 이곳에 안 계시지만 빛과 소금 같은 가르침은 내게 내내 머물리라.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