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어살 무렵 밭에 간다 말하고
수수밭 한가운데서 읽었던 순간
육남매중 다섯째가 고른 은신처
책장 넘기는 장면 생각하니 애틋
엄마가 열두어 살 무렵, 어떤 이야기 책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밭에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수수밭 한가운데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고 한다.
"보영이랑 진숙이. 그 둘이 주인공이야. 하나는 부잣집 딸이고 하나는 가난하고. 그 둘이 친구인데 이야기에 너무 빠져가지고…."
"근데 왜 수수밭이야? 수수가 옥수수를 말하는 건가?"
"옥수수가 아니라 밥에 놓아먹는 노란 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잡곡이 열리는 거지. 수수는 높게 자라니까 밭 가운데 들어가 앉아있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실려 높다란 수수가 자라는 시골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육남매 중 다섯째였던 엄마는 집에서는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를 골랐던 것이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오롯이 책에 몰두하고 싶어서. 엄마가 수수밭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장면을 생각하니 딸을 떠올릴 때처럼 마음이 애틋해진다.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데웠겠지만 엄마는 그것도 모른 채 보영이랑 진숙이의 인생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다. 바람이 불면 풀들이 소리를 내며 나부끼고, 멀리서 둘째 언니가 불렀겠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완전히 책 속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일은 얼마나 마법 같은가! 물론 나는 독서가 주는 명상과도 같은 고도의 집중 상태를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몰아내고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경이로운 순간을. 마침내 책을 다 읽고 일어나면 세상이 얼마나 어리둥절해 보이는가. 해가 기울고 엄마는 길어진 그림자를 앞세워 밭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직 휘발되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채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을 향해, 대가족이 복작거리는 생활의 장소를 향해 걸어갔을 것이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누구였어? 이런 생각들이 정확한 언어로 바뀌지 않은 채 오르골의 태엽처럼 천천히 돌아가면서 강렬한 감정을 일으켰을 것이다. 책을 보물처럼 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선명히 그려져서 나는 놀랐다. 다 자라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또 어렵지도 않다. 나도 그 나이대의 딸을 키우는 또 다른 엄마가 되었으니까.
수수밭에서 책을 읽던 소녀가 자라서 내 어머니가 되고, 그 몸을 빌려서 세상으로 나온 내가 다시 책들의 복도를 서성거리는 일이 문득 신비로운 회로처럼 여겨진다. '내가 책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 것은 어쩌면 수수밭의 오후 때문인지도 몰라. 책 읽을 땐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안 한 엄마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소녀가 물어볼 때라야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그 수수밭에 가보고 싶어서." 소녀를 키우면서 또 다른 나이든 소녀와 만나는 이상한 소녀, 그게 바로 나다. 수수밭 한가운데처럼 인생의 복판에 앉아있는 지금의 나. 문득 아득하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