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강렬한 기억 남은 독서는
열두어살 무렵 밭에 간다 말하고
수수밭 한가운데서 읽었던 순간
육남매중 다섯째가 고른 은신처
책장 넘기는 장면 생각하니 애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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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던 나는, 한참 책 속에 빠져 있는데 말을 시키는 사람을 너무 싫어했다. 그렇게 독서의 흥을 깨는 사람 중 단연코 1위는 엄마였다. "밥 먹어라." 이 말 한마디면 셜록 홈즈의 놀라운 추리도, 다리 기둥에 매달린 빨강머리 앤도 멈춰서야 했으니까. 그러면 읽던 페이지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불만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투덜투덜 밥상에 앉으며 책을 읽을 때는 제발 아무 말도 시키지 말아달라고 누차 강조했다. 지속적인 호소 때문인지, 성장기 내내 엄마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밥 먹으란 소리 말고는 아무 말도 걸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는 내가 쓴 책이 아니면 구태여 독서를 하지 않는다. 엄마가 섭취하는 활자는 주말에 성당에서 나눠주는 주보와 '매일미사' 외에는 없는 듯 보인다. 딸이 고생해서 쓴 글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내 책도 의무감으로 겨우 보시는 듯하다. 그런 엄마에게도 일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독서의 순간이 있었다.

엄마가 열두어 살 무렵, 어떤 이야기 책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밭에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수수밭 한가운데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고 한다.

"보영이랑 진숙이. 그 둘이 주인공이야. 하나는 부잣집 딸이고 하나는 가난하고. 그 둘이 친구인데 이야기에 너무 빠져가지고…."

"근데 왜 수수밭이야? 수수가 옥수수를 말하는 건가?"

"옥수수가 아니라 밥에 놓아먹는 노란 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잡곡이 열리는 거지. 수수는 높게 자라니까 밭 가운데 들어가 앉아있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실려 높다란 수수가 자라는 시골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육남매 중 다섯째였던 엄마는 집에서는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를 골랐던 것이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오롯이 책에 몰두하고 싶어서. 엄마가 수수밭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장면을 생각하니 딸을 떠올릴 때처럼 마음이 애틋해진다.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데웠겠지만 엄마는 그것도 모른 채 보영이랑 진숙이의 인생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다. 바람이 불면 풀들이 소리를 내며 나부끼고, 멀리서 둘째 언니가 불렀겠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완전히 책 속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일은 얼마나 마법 같은가! 물론 나는 독서가 주는 명상과도 같은 고도의 집중 상태를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몰아내고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경이로운 순간을. 마침내 책을 다 읽고 일어나면 세상이 얼마나 어리둥절해 보이는가. 해가 기울고 엄마는 길어진 그림자를 앞세워 밭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직 휘발되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채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을 향해, 대가족이 복작거리는 생활의 장소를 향해 걸어갔을 것이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누구였어? 이런 생각들이 정확한 언어로 바뀌지 않은 채 오르골의 태엽처럼 천천히 돌아가면서 강렬한 감정을 일으켰을 것이다. 책을 보물처럼 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선명히 그려져서 나는 놀랐다. 다 자라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또 어렵지도 않다. 나도 그 나이대의 딸을 키우는 또 다른 엄마가 되었으니까.

수수밭에서 책을 읽던 소녀가 자라서 내 어머니가 되고, 그 몸을 빌려서 세상으로 나온 내가 다시 책들의 복도를 서성거리는 일이 문득 신비로운 회로처럼 여겨진다. '내가 책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 것은 어쩌면 수수밭의 오후 때문인지도 몰라. 책 읽을 땐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안 한 엄마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소녀가 물어볼 때라야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그 수수밭에 가보고 싶어서." 소녀를 키우면서 또 다른 나이든 소녀와 만나는 이상한 소녀, 그게 바로 나다. 수수밭 한가운데처럼 인생의 복판에 앉아있는 지금의 나. 문득 아득하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