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자체가 이젠 존재하지 않아
저열한 동기·욕구 정치 오염시켰고
국민들조차 언급하려하지 않는다
적나라한 약탈적 사적국가로 전락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대의 정치체제로서 다수를 대표하는 사람이나 정당이 그만큼의 권력을 위임 받는다. 유권자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인지, 유권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견해가 정치나 정책으로 구체화되어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실제로 대표하는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영역에도 존재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를 고려한다면 정치적 대표성의 디커플링은 항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다수의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익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공익을 대표한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소수자의 이익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사적 영역에서 사적 방식으로 출발하여 공적 영역에서 공적 방식으로 견해를 모아가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불완전하지만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는 현실의 정치에서는 다수의 공익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정치의 장에서 절대적 정의를 주장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 목적을 위해 추종자, 즉 인적기구가 필요하다. 현대의 정치에 있어서 정당과 추종자, 나아가서 소극적 유권자까지를 포함한다.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자는 이 인적 기구에 적절한 보상을 해주어야 스스로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내적 보상으로는 증오심과 복수심의 충족, 원한의 충족 및 사이비 윤리적 독선에 대한 욕구의 충족 등이 있고, 외적 보상으로는 모험, 승리, 전리품, 권력과 봉록 등이 있다. 지도자의 성공여부는 이 인적기구의 원활한 작동여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의 성공은 그의 동기가 아니라 이 기구의 동기에 달려 있다. 즉, 그의 추종자들의 행위에 깔린 윤리적으로 대부분 저열한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지도자와 그의 대의의 주창 및 그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의 경우, 복수심, 권력욕, 전리품과 봉록에 대한 숨어있는 욕구의 윤리적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 정의(실제로는 상대적 정의에서 출발하여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가 사라졌고, 인맥과 연고가 기승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절대적 정의와 저열한 동기 사이에서 후자 쪽으로 더욱 기울어진다. 이제 정치는 선거에서의 승리 가능성과 자신들의 접근가능성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선거 승리는 감성적 팬덤정치에 의해 결정되고 지도자에의 접근은 정치적 노선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시도된다. 이제 민주주의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국가적, 국민적 합의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그 누구도 문제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지도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저열한 동기와 욕구가 모든 정치를 오염시켰고, 이제 국민들조차 이를 인식하거나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민주적 공적국가는 적나라한 약탈적 사적국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저열한 동기들이 절대적 정의로 둔갑하기 이전에 규범적 제재를 가했거나 정치적 지도자를 꿈꾸는 영역에서는 사적 욕망이 공적 정의를 압도하도록 하지 않아야 했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