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정치적 존재'로 압착
그 환각적 믿음에 비로소 안도감
진리 가까운 빛깔은 오히려 '회색'
양 극단 사회 중재의 힘 필요한 법
인간은 본래 환상, 환각의 존재다. 인간은 늘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가상'에 휩싸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가상의 동굴 속의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힐끗'이라도 쏘여본 사람들을 오히려 비웃는다. 환상, 환각의 힘이 너무 센 나머지 오히려 진리를 가상처럼 느끼는 단계에 다다른 까닭이다.
'장주지몽(莊周之夢)'이라는 말도 있다. '장주', 곧 장자의 꿈은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지금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를 묻는다. 요즘 우주론 가운데에는 정말로 현실을 사는 우리가 가상 세계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이론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달리는 현실이라는 것에 그토록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른다.
'우리'에 대한 환상은 실로 강력해서 '나'의 가족은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 이름하여 가족주의다. 또 이 가족을 묶는 큰 가족, 위대한 가족으로서 민족, 국가는 '나'들의 희생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게 하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보다는 단위가 작은데도 그 못지 않게 큰 힘을 발휘하는 환상적인 '우리'의 단위가 있다. 진보파다, 보수파다, 좌파다, 우파다 하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 논리는 환상이며 환각이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한다.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인간의 삶은 수없이 많은 차원과 국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혼은 순수한 좌 또는 우가 되고 싶겠지만, 인간이란 수많은 차원과 국면의 통합체요, 때문에 그렇게 순수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에서는 진보적이지만 어떤 것에서는 보수적이다. 인간 전체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나'는 모순적 존재요, 모순적인 것들의 통합체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정치적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하는 정치적 논리로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자신을 정치적 차원의 존재로 압착시키기를 즐긴다. 그 환상적, 환각적 믿음에 자기를 맡기고 나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총격을 받은 것은 확실히 암살 미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이 토머스 크룩스 한 사람의 소행이든, 그 배후에 어떤 조직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든, 이것은 확실히 '공동환상'의 결과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편, '우리'는 옳고 저쪽은 틀리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굳어지면 어떤 수단도, 방법도 정당할 수 있다는 신념이 형성된다. 트럼프를 파시스트나 나치로 이해하는 방식이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있다. 이들은 트럼프가 지난 수십년 사이에 증대한 백인 하층민들의 곤궁한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트럼프의 보수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이를 과대평가하면서 그의 진보적인 측면은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의 '신념파'들이 초거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되는 두 정당의 정치 '팬덤'들은 이 신념파들의 수중에 들어 있는 다중 '군대'인 셈이다. 이 정치적 팬덤은 좌우, 진보 보수의 어디가 옳다는 시각에서 훌쩍 더 나아가 이를 어느 한 정치인만이 대변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나머지는 다 '가짜'요, '수박'이요, 보수를 구할 자는, 정의를 실현할 자는 '그' 인물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신념파들은 '중간파'니, '회색인'이니, '기회주의자'니들 한다. 그러나 진리에 가까운 빛깔은 오히려 회색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양극단의 사회에는 중재의 힘도 필요한 법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