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가요·청년문화 중심 '김민기'
노래 통해 민주화세력 구심점 역할
대학가요 이끈 엔터테이너 '이수만'
국내 안주하지 않고 세계시장 진출
BTS 등 이들이 뿌린 씨앗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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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 가수, 공연기획자로서 그의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다. 김민기는 6·25전쟁 중에 태어나 유신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의 이름은 권위주의 정권의 대중예술 탄압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386대학생은 입학과 동시에 선배로부터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배웠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들을 수 없었다. 모두 금지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생들에게 김민기의 노래는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개적으로 구전되었다. 당시의 대학 정원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만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생들은 엘리트였고 그들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에 도전했다. 청년문화의 중심에 김민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시대의 대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만 부른 것은 아니다. 1977년에 탄생한 대학가요제는 권위주의의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나 어떻게', '내가', '그때 그사람', '꿈의 대화', 'J에게' 등 가요제의 수많은 명곡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캠퍼스의 시위현장에서는 저항가요가, 학교 앞의 다방과 거리의 레코드점에서는 대학가요가 울려 퍼졌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는 다양해졌고, 대중들의 관심과 소비는 증가했다. 음악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다져진 셈이다.

마침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김민기의 노래도 해금(解禁)되었다. 그러나 그는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의 노래는 자연스럽게 운동권의 전유물처럼 변해갔다. 김민기 또한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가수에서 공연기획자로 변신했다. '지하철 1호선'과 어린이 뮤지컬을 상연(上演)했다. 그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이후 한국대중문화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학전소극장은 운영난으로 최근 폐관됐다. 이제 김민기도 타계했으니 학전소극장의 명맥도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민기는 자신의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 '꽃피고 눈 내리는 이 강산에' 묻혔다.

대중음악계에서 김민기와 동시대를 산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이수만'이다. 이수만은 가수, 사회자로 활동했다. 초기 대학가요제의 MC가 바로 이수만이다. 1952년생으로 김민기보다 한 살 어리다. 김민기와 이수만 모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김민기가 저항가요의 중심에 있다면 이수만은 대학가요를 이끌어 간 엔터테이너라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이수만 역시 음악 프로듀서로서 변신했다. 그는 일찌감치 대중문화의 성장 잠재력을 발견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보아를 시작으로 소녀시대,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수많은 아이돌그룹을 배출했다. 그들을 통해 한국가요는 세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후일 이수만은 K-POP의 선구자로 기록될 것이다.

김민기와 이수만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살아왔다. 그들은 수재였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김민기는 노래를 통해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민주화로 인해 대중문화 검열제도가 폐지되었다. 대중예술인들은 제한 없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모두가 제조업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시대에 우리 음악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하고 세계적인 히트 상품으로 만든 이수만이 없었다면 지금의 K-POP은 불가능했다. 그는 재능 있는 이를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해외 대중문화의 흐름을 파악하고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했다.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했다. 오늘의 BTS, 블랙핑크, 뉴진스 등은 모두 김민기와 이수만과 같은 선구자들이 뿌린 씨앗이 맺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김민기와 이수만은 음악을 통해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같은 한민족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시대 상황, 주변의 분위기, 본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다시 하나로 모였고 그 결과 오늘날의 K-POP이 탄생했다. 물론 그전에 그들은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고단한 한국현대사를 함께 살아 온 우리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다시 한번 김민기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영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