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게 아닌것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장난 에어컨
시원하게 해주는 일 즐겁다는 기사
그 어떤 더위도 그를 이기지 못할 것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은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긍정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마틴 셀리그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자신이 펴낸 책 '번성하라'에서 어떤 동료 교수의 소년 시절 추억담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소년이 무슨 일인가로 잔뜩 기분을 상하고 풀이 죽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면 엄마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얘야, 너 오늘 영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알지? 얼른 나가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좀 도와줘 보렴." 엄마의 그런 기분 전환법을 들으며 자란 소년은 지금 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다. 남을 도우면 내가 낫는다는 것을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치유법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학문적'으로 풀어보기 위해 그 교수는 엄마가 일러주곤 하던 그 치유법의 효과 유무를 엄밀한 과학적 실험에 붙여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의 방식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일화는 한 어머니의 소박하지만 비범한 지혜가 긍정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누군가를 도울 때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일이 실은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읽은 지 오래된 책의 한 대목을 떠올린 것은 얼마 전 인간은 누군가를 도울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집의 에어컨이 작동을 멈췄다. 더위와 관련한 각종 기상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무더운 올여름 날씨에 에어컨마저 고장난 것이다. 부랴부랴 서비스 센터에 수리를 요청했지만, 수리 서비스를 신청한 이들이 많아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야속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난 뒤 내 머릿속에는 형극(荊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에어컨 없이 이 여름을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긍정은커녕 세상이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에어컨 수리 기사가 왔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미안해하며 유난히 더운 여름에 더운 곳만 찾아다니시느라 고생이 많다고 인사를 건넸다. 하긴 에어컨이 고장난 곳이 일터인 에어컨 수리기사는 언제나 더운 곳에서 일할 수밖에 없고 수리를 성공적으로 마쳐 시원해지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하니 누가 생각해도 안쓰러운 처지일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시원하게 해주는 일이 즐거워 더위를 느끼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환한 표정을 보고 그 말이 공연한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짜증이 날 정도로 더운 곳에서 꽤 오랜 시간 땀 흘리며 일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마치 해탈한 사람처럼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긍정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수리를 마친 그는 가족이 건네주는 시원한 음료수를 마신 뒤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하고 다시 더위에 지친 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났다. 나는 어떤 더위도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왔다 간 뒤 세상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보인 까닭은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더위의 기세가 어서 누그러져 그가 조금은 덜 덥게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