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발, 놈: 인류의 시작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한 백승기 감독
조악한 만듦새 속 세련미·진지함 등 담아
중구 구도심·내항 등 촬영지 대부분 '인천'
"과학·종교 등 주장 섞은 인류 화합 작품"
촬영용 소품을 정말로 '소품'(호랑이 가죽을 인형으로)처럼 보이게 하고, 동네 야산임이 분명해 보이는 '원시림' 로케이션, 각종 패러디와 유머 코드 같은 능청스러움으로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독립 장편 영화 '시발, 놈: 인류의 시작'(2016년 개봉).
자칭 'C급 영화'로 '백승기 유니버스'를 구축하고 있는 영화감독 백승기가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5기, 6기) 입주작가로 활동한 2014~2015년 촬영하고 편집해 연출한 영화다. 이 영화는 유인원만 사는 시대 갑자기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로 보이는 인류가 먹고 싸고 입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성을 만나고 헤어지고, 권력을 쟁취하고 또 그 권력을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행복과 좌절을 느끼고,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왜 'C급 영화'로 지칭하는지 영화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초저예산 영화를 표방하는 조악한 만듦새, 그 가운데 불쑥 등장하는 세련된 영상미와 편집, 코미디 요소를 섞긴 했으나 영화 전반에 흐르는 진지함 등이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비롯한 백승기 영화의 특징이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만듦새만 보고 가벼운 영화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렇게 간단한 영화가 아니다. 우주과학과 인류학, 성경, 플라톤의 '향연' 등이 녹아 있다. 최초의 인류가 이미 죽어있는 호랑이의 가죽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거짓 선동(혹은 가짜 뉴스)이 등장하고, 다시 맹수가 유인원 무리를 공격할 때 권력자가 된 최초의 인류가 지시하는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참사를 연상하게 한다. 미술 전공자인 감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장면에서 현대미술의 개념을 생각했다고 한다.
"인류의 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과학계든 종교계든 저마다 방식으로 해석할 뿐이지 정답이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방법도 없고요. 창작자 입장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 믿기보다는 저만의 인류기원설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 역사, 종교의 주장을 섞어서 인류의 화합을 위해 만들었죠."
백승기 감독은 인천의 예술가로도 분류된다. 그의 영화 속에선 인천이란 지명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로케이션은 대부분 인천이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 강화도 마니산, 만월산, 자유공원 등지에서 촬영됐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인천아트플랫폼의 국내외 입주작가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백 감독은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시민과 어린이 대상 영화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했다"며 "예술인 간 교류와 협업, 지역사회와의 교류, 예술인으로서의 자존감 회복을 경험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백 감독이 최근 연출한 독립 장편 영화 '잔고: 분노의 적자'(2023년 개봉)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3년)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백 감독의 '영화(시네마)에 대한 영화'다. 서부극의 서사를 차용해 배경도 언어(한국식 영어)도 모두 미국이다.
이 영화 역시 대부분 인천 중구 구도심, 북성포구, 인천 내항, 자유공원, 대청도 옥죽동 해안사구 등지에서 촬영됐다. 영화 속 브로드웨이 마지막 극장 '오르페움 펠리스'는 다름 아닌 인천의 '애관극장'이다. 영화 속 악당은 '금싸라기 땅' 오르페움 펠리스를 매입해 철거하려 하는데, 시민단체가 반대해 '똥싸라기 땅'이 됐다고 투덜거린다. 현실 속 애관극장의 처지와 겹쳐 보인다.
백 감독은 현재 첫 상업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백승기 유니버스'가 어떻게 확장될지 궁금해진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과 '잔고: 분노의 적자'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네이버 등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에서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