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되지 않은 일기'란 시 흥미
자기 사연과 똑 닮은 시집 빠져
공감의 포인트 제대로 배운 셈
"동시는 쇼츠" 벙찌는 독후감
요즘은 일기 숙제를 내지 않는 초등학교도 많은 모양이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일기 숙제는 없다. 1, 2학년 때는 숙제가 아니어도 곧잘 쓰더니 요즘은 그래서 통 쓰지 않는다. 어쩌다 기분이 좋은 날에만 선심 쓰듯 한 장씩 쓰는데, 그날 아이는 일기를 썼다. 대가족 모두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신난 아이는 도대체 이걸 어디다 자랑하나 고민하더니 일기장을 폈다. 컴퓨터 모니터로 몇 번이나 전자항공권을 들여다보며 설렜던 아이는 "드디어 사촌언니와 함께 여행을 가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걸, 일기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여행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운동선수인 중학생 사촌 언니의 훈련 일정과 여행이 겹친 것이었다. 항공권은 곧바로 취소했고 딸아이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쓰다 만 일기 끝에 아이는 "너무 슬프다, 여행이 취소되었다"라고 썼다. 나는 옆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를 달랬다. "걱정 마. 날짜를 다시 잡으면 돼. 다 잘될 거야." 아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 일기는 어떡해? 어떻게 써?" 나는 전화로 가족들과 일정을 다시 조율했지만, 원체 대가족이라 다시 휴가를 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되는 듯하다가 다시 어그러졌고, 또 풀리는 듯하다 어그러졌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연필을 손에 쥔 채 울었다 웃었다 했다. 전화를 하느라, 달력을 체크하느라, 아이를 달래느라 나는 진이 홀랑 빠지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 나는 동시집 한 권을 읽었다. '꼬마 뱀을 조심해'. 맙소사, 나는 시집 속 동시 한 편을 읽자마자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제목은 '완성되지 않는 일기'였다. 보드를 타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아이는 일기에 재수 없는 날이라 쓰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다친 무릎을 보고 야단을 쳐서 속상한 날이라고 쓰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새 보드를 사주겠다 해서 땡 잡은 날이라 써야지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아빠는 자전거도 사준다 하고선 안 사줬다. 그러면 짜증나는 날이라고 써야 하는데. 동시의 결말은 이렇다. 아직은 오늘이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 알 수 없으니까 결정되고 나서 그때 써야지, 하고 말이다. 나는 하교하는 딸아이에게 짜잔, 동시집 그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심드렁하게 "동시네?" 하던 아이는 "딱 네 이야기야. 진짜 웃겨"라는 내 말에 못 이기는 척 책을 들었다.
결론은 빤하다. 아이는 제 이야기를 그대로 갖다 쓴 듯한 책을 생애 처음 읽은 셈이 되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8년밖에 되지 않아 이 아이가 겪은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이야기야! 엄마, 이 작가가 내 이야기를 알고 쓴 것 같아!" '공감'의 포인트를 아주 제대로 배운 셈이다. 아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잠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완성되지 않은 일기'뿐 아니라 이 동시집의 거의 모든 시는 스토리로 가득하다. 엉뚱하고 귀엽고 신나고 때로 슬픈 이야기다. 알 듯 말 듯 헛갈렸던 그동안의 시들과 달라 잔뜩 재미를 느낀 아이는 일주일 내내 동시집을 가방에 넣고 학교엘 갔다. 물론 마지막 독후감은 조금 벙쪘다. "너는 그동안 동화만 좋아했잖아. 시는 싫다더니 이번 책은 왜 그렇게 좋아해?" 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이거, 쇼츠 같애. 동화가 그냥 유튜브라면 이건 짧게 만든 쇼츠 같은 느낌?" 맙소사.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동시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넘어가는 거로.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