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했던 얼굴에 띤 미소… 낯선 땅에서 행복 찾은걸까
막연한 환상 좇는 순진함이 아닌
사회가 만든 번아웃 청년의 모습
뉴질랜드서 만난 교포 가족 조명
적응 못하는 사람들 서사도 담아
'헬조선(지옥+한국)'과 '탈조선(탈출+한국)'. 지난 2015년 절망적인 한국 사회를 청년들이 자조하며 부르던 유행어였다. 당시 사회 모습이 이 새로운 조어들을 탄생시키는 데 한몫했다. 양극화, 능력주의, 불평등…. 거대한 부조리가 청년들의 일상 곳곳에서 삐져나왔다.
한국 사회가 정해놓은 '대입-취업-결혼-내집 마련' 순으로 이뤄진 트랙은 이런 부조리 위에 설계됐다. 모두가 상위권에 랭크해 '정상'이 되고 싶어 하지만, 순수한 노력만으로는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탈조선은 절망을 체득한 청년들을 위한 신기루 같은 단어였다.
9년이 흐른 지금, 헬조선과 탈조선도 그새 해묵은 단어가 됐지만 그 속에 담긴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는 9년 전 열띠었던 청년들의 자조를 다시금 소환해 새롭게 풀어낸다.
영화는 낡아버린 단어는 제쳐놓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감정에 집중한다. 헬조선이나 탈조선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 사회 특유의 분위기가 만든 번아웃 상태에 묶인 청년의 모습, 한국을 떠나는 선택이 결코 막연한 환상을 좇는 순진함이 아니라는 점을 주인공 20대 여성 '계나'를 통해 보여준다.
"배고프고 춥지만 않으면, 나는 그게 진짜 행복이야." 계나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말 그대로 한국이 싫어서다. 영화 속에서 한국은 지독한 추위가 찾아온 한겨울로 묘사된다. 한국에서 계나의 표정과 말투, 옷차림새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추위를 싫어하는 계나는 그렇게 가족과 남자친구에게 뉴질랜드로의 이주를 선포하고 떠난다. 뉴질랜드에서의 삶은 당연히 천국일 수 없다. 하지만 계나의 모습이 정반대인 것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 팔뚝의 문신, 그리고 더는 무표정이 아닌 계나의 미소. 소박하지만 자신이 원하던 행복을 찾은 듯한 표정임은 분명하다.
영화는 동명의 원작 소설(장강명 作) 속 결말을 비롯한 일부 설정을 각색하면서 관객에게 새로운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원작에서 계나는 서울시 아현동에 살았지만, 영화에서는 인천에 거주한다. 계나는 매일 아침 직장이 있는 강남까지 지옥의 출근길을 떠난다. 마을버스로 12정거장을 간 뒤 1호선을 타고 신도림에서 환승해 2호선 강남역에서 내린다. 그런가 하면, 뉴질랜드에서 만난 교포 가족의 이야기에 비중을 두면서 계나와 달리 타지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서사도 다양하게 담아냈다.
지난 21일 서울시 용산구 CGV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장건재 감독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과정에 대해 "소설의 특정 장면이나 대사보다도, 소설에 있는 이국의 냄새와 분위기처럼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영화화하는 게 까다로웠다"며 "자신의 삶을 다른 공간으로 바꾼 뒤 새로운 삶을 사는 데서 오는 쓸쓸함과 통쾌함이 동시에 있다. '소설의 이 감각을 영화로 옮겨올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에서 미묘하게 달라진 계나를 연기해야 했던 고아성 배우는 캐릭터 분석에 대해 "계나가 겪은 수년간의 시간을 한눈에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교포 메이크업이라든가 태닝을 처음 해봤다"며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뉴질랜드로 떠나는) 계나를 보는 관객들의 의견이 반반 정도로 갈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부류의 관객들을 생각하면서 연기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헬조선 담론'을 시네마적으로 새롭게 재현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오는 28일 개봉한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