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서 지나 백로가 다가오니 풀벌레 울음소리가 달라졌다.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폭염의 기세는 여전해도 자연의 시계는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매미 울음소리, 선음(蟬音)이 여름의 상징이라면 귀뚜라미 울음소리, 실솔음(실솔音)은 가을의 상징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을 정취를 맛보기 위해 청솔당(廳솔堂), 즉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당호를 짓고 가을의 낭만을 즐기려는 시인도 있다.
일본의 전통시가인 하이쿠에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많다. 하이쿠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로 17자로 구성되는 한 줄 정형시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와 축약된 표현으로 언어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본의 대표적 전통 시가 바로 하이쿠다. 하이쿠의 영향을 받았거나 하이쿠와 유사한 단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시인으로는 '지하철역에서' 등처럼 시적 실험을 시도한 미국의 에즈라 파운드(1885~1972)를, 국내 시인으로는 나태주(1945~)와 수원 출신 최동호(1948~) 고려대 명예교수를 꼽을 수 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으로 바쇼·부손·잇사·지요니 등을 들 수 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소재로 한 하이쿠로는 지요니의 "보름달 뜬 밤 돌 위에 나가 우는 귀뚜라미", 지게쓰의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허수아비 속에서", 그리고 바쇼의 "참혹하구나, 갑옷 밑의 귀뚜라미 울음소리" 등이 특히 유명하고 널리 애송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도 "어느 곳에서나 술 잊기 어려워/서리 내린 뜰에 늙고 병든 사람/희미한 소리로 귀뚜라미 우는데/마른 잎은 오동나무에서 떨어지는구나/귀밑 머리털은 수심으로 희어졌는데/취기에 잠깐 새 붉어지는구나/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가을바람을 어찌하겠는가"라고 읊었다.
8월 전국 평균 열대야 일수가 25일 기준 10.3일로 역대 최고 기록을 썼다. 서울 기준 34일간 이어졌던 열대야가 멈춘 지 단 하루 만에 다시 열대야가 시작됐고, 제주에서는 42일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다. 제10호 태풍 '산산'이 일본을 향해 북서진 중이라 폭염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전망이다. 폭염과 세파에 힘겨운 나날이지만, 가을 전령사인 귀뚜라미 울음소리라도 들으며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자.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