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가루 0.001g… '덧없음'의 무게
풍경·정물·초상, 초현실적으로 재해석
정선 '노백도' 한국 고미술 한 공간 마주
먼지 주제 쉽게 흩어지는 재료 물성 표현
세계 유수 아트페어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한 작품의 주인공, 현존하는 인기 작가 니콜라스 파티(44). 그의 지문이 묻은 파스텔 가루 0.001g은 과연 얼마로 환산할 수 있을까. 낙찰된 가격으로 단순 계산한다면 최소 1만원부터 시작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 전시실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오던 것들이 여기서는 무효하다. 그가 6주가량 용인시에서 머물며 완성한 대형 파스텔 벽화는 전시가 끝나면 곧바로 지워진다. 그런가 하면 그의 기존 작품은 한국 고미술품과 한데 묶여 모호한 시간 속에 박제됐다.
결국 파스텔의 무게는 저울에 달 수 없고, 값은 '0원'으로 수렴한다. 고가 미술품이 내뿜는 위엄과 이를 둘러싼 속물적 특성이 맞부딪친 아이러니다.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는 동시대 스타 작가로 자리매김한 니콜라스 파티의 국내 최초 개인전이다. 각각 기존 회회와 조각 48점, 신작 회화 20점,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파스텔 벽화 5점 등으로 구성됐다. 지난해 수화 김환기 회고전으로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이 선보이는 첫 현대미술 기획전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 개인전이지만, 니콜라스 파티는 한국 관람객에게 '파스텔의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제법 친숙하다. 앞서 그의 작품이 아트페어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등 화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스위스 로잔 출신인 니콜라스 파티는 파스텔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작가다. 풍경, 정물, 초상을 초현실적으로 재해석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냈다. 파블로 피카소, 조르조 모란디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점이 화폭에서 은은하게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과거와 현재의 대응이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서양의 젊은 작가와 한국의 고미술품이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
특히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의 '노백도'(조선 18세기 전반)와 니콜라스 파티의 '주름'(2020)의 묘한 조합이 인상적이다. 목숨 수(壽)자를 잣나무의 줄기로 표현한 정선의 그림은 '주름'이 표현하는 인간과 비인간, 생과 죽음의 경계와 맞물리며 대비를 이룬다.
니콜라스 파티가 주재료로 사용하는 파스텔도 '더스트', 먼지라는 전시 주제와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조금만 힘을 줘도 으스러질 만큼 매우 무르며, 입으로 바람을 불면 쉽게 공중으로 흩어지고 마는 파스텔의 물성은 작가가 이곳 전시실에서 직접 그린 벽화 5점을 통해 극대화된다.
미술관 로비 중앙계단 벽에 자리한 '폭포'(2024)는 붉은 색감의 바위 사이로 푸르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표현했다. 벨벳의 촉감을 연상케 하는 파스텔만의 특성이 비현실적인 풍경과 어우러진다. 전시가 끝난 뒤 사라질 이런 일시적인 그림은 그 가치를 저울질하기보다는 그리움을 남긴다.
먼지처럼 사라질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니콜라스 파티는 "'덧없음'이라는 개념은 이번 전시에서 제가 탐구하는 주제와도 잘 맞는다. 일시성, 소멸, 후회라는 것들은 한국의 다른 작품(전시실 내 고미술품)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라며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듯이, 이곳의 작품들 또한 사라질 것이다. 어쨌든 모든 것은 언젠간 사라지기 마련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