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민장으로 가신지 6년만에
인천대 송도캠 앞 길 '최기선路'
전직 시장의 명예도로명은 처음
선인학원 시립화 미증유 교육개혁
강화·옹진 통합 '광역시' 디자인
'리더의 배포'로 뚝심있는 승부사
도시 품격 높이는 등 세가지 이득
정호승 시인이 쓴 '봄길'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인천에도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최기선이 그렇다.
인천시 명예도로명 활성화 계획의 일환으로 인천대 송도캠퍼스 정문 앞길이 최기선로(崔箕善路)로 지정됐다. 지정 고시는 연수구에서 했다. 오는 10일 최기선로 명예도로 명명 기념식은 유정복 시장이 나서서 인천시가 주최한다. 이미 교내에 최기선 흉상도 건립한 바 있는 인천대 박종태 총장이 표지석을 만든다. 인천시민장으로 고인을 떠나보낸 지 6년 만의 일이다.
전국 명예도로명 가운데 전직 시장을 명명한 것은 인천이 처음이라는 말도 들린다. 고인이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호불호가 있었을 텐데도, 인천이 인천다운 일을 했다. 도로명은 최기선로로 지정됐지만 시민들은 이 길을 최기선 동행길로 생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인천을 사랑한 이가 어디 최기선 한 사람뿐이랴. 이 길이 오직 최기선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면 길이 되는 인천사람들의 길이 되길 소망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도시의 랜드마크를 보면 고층 빌딩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도시의 대표 인물들의 발자취에 도로명을 부여하고 거기에 도시의 위상과 이미지에 맞는 문화 콘텐츠를 입히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도시 브랜드 가치 상승에 중요한 몫을 하도록 하고 있다.
해방둥이 최기선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에 크게 헌신했다. 그는 법대생이라면 누구나 꿈꿀 고시공부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군사독재와의 엄혹한 투쟁 속으로 뛰어들었던 이유에 대해 '유신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그런 헌법을 공부하는 것은 무의미했다'고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인천 사학비리의 해결사였다. 선인학원 사태를 잘 모른 채 인천시장으로 부임한 후 진실을 목격하고 행동에 옮겨 종결시켰다. 군부 세력을 등에 업은 사학 설립자의 부정부패를 제거하고 교권을 회복시킨 선인학원 시립화는 건국 후 일어난 전대미문의 교육개혁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라 최기선이 아니었다면 해결되지 않았을 문제였다. 그 유산을 우리는 지금 국립인천대학교에서 누리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인천시 광역화의 디자이너였다. 경기도였던 강화·옹진·검단을 인천시로 통합해 지금의 인천광역시가 있게 한 장본인이다. 특히 인천 광역화 단계에서 그는 강화·옹진을 땅으로 보지 않고 바다로 보았다. '바다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그의 평소 신념과 철학이 작동한 것이다. 인천 앞바다가 인천이려면, 강화도와 옹진 서해 5도가 이어져야만 진짜 인천이라는 숙명적 미래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최기선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선구자였다. 혹자는 인천이 두 번의 천지개벽을 했는데 하나는 근대 개항이고 다른 하나는 송도국제도시라고 한다. 바다를 육지로 만든 송도는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4년 9월10일 시작됐다. 당시 동춘동에서 열린 기공식의 명칭은 '인천송도앞바다매립신도시조성기공'이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호 건설을 위해 아파트를 지으라고 내준 매립면허로 탄생한 송도매립지의 용도를 당시 인천시장의 동의가 필요했던 공항건설촉진법 제정과 빅딜을 해서 경제자유구역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 개척자였다.
최기선과 같이 일을 해본 사람들은 그를 조직 관리의 달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그를 잘 기억하는 공무원들의 증언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있다. 공무원들이 망설이는 일이 생기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은 자네들 판단대로 하고 막히는 것이 있으면 들고 오라.' 꼬치꼬치 간섭하는 필부의 조직관리가 아니라 조직의 힘은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인정할 때 극대화된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는 리더의 배포를 지닌 뚝심의 정면 승부사이기도 했다. 영종 신공항의 이름을 지으려고 정부가 시행한 전국 공모에서 세종공항, 서울공항 등이 우세한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자 최기선은 인천공항을 단호히 주장하며 인천시민 100만 명 서명 운동의 힘을 배경으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담판을 했던 그의 뚝심을 당시 공무원들이 증언하고 있다. 훗날 충남 조치원과 연기군이 세종시가 되었는데 만일 지금 영종에 있는 인천공항 이름이 세종공항으로 되었더라면 인천은 무슨 꼴이 되었을까?
그의 많은 인천사랑의 흔적들이 있지만 우리가 그를 인천의 지도자로 사랑하며 최기선로 명명을 반기는 참 이유는 더 높은 곳에 있다. 그가 생전에 보여준 사람의 두께, 인간의 향기는 오늘을 사는 인천시민들과 리더들에게 사표가 되어 인천 발전의 동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최기선의 두께는 생전 그가 좋아했던 군자일언 사마난추(君子一言 駟馬難追)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다. 최기선의 함량과 향기를 이야기할 때 별도의 긴 설명 대신 내가 곧잘 인용하는 글이 있다. 고려대 안영옥 교수가 번역한 돈키호테 속편 16장에서 미란다가 돈키호테에게 자기를 소개하며 한 말이다.
'남의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며 내 앞에서 남의 이야기가 행해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캐는 것도 없고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지도 않습니다. 날마다 미사를 드리고 내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만 위선과 허영이 내 마음속에 들어올 틈을 주지 않으려고 선행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이번 최기선로 명명으로 인천은 세 가지 큰 이득을 얻었다. 첫째는 인천의 도시 품격을 높인 것이고 둘째는 리더를 기릴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축적이며 또 하나는 미래 인천의 젊은이들을 키우는 좌표를 분명하게 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최기선로를 걸으면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인천은 인천이기만 할 때 위대하다.
/박영복 前 인천시 정무부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