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표 학자… 동아시아 석학
추사처럼 다산 현양 하면 어떨까
무도한 권력 현인 탄압해선 안돼
비애의 땅 과천서 다산 기려보자
자연환경만 좋다해서 반드시 좋은 도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도시 안에서 살았거나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 문제다. 옛말에 '현인소과지지 산천유광(賢人所過之地 山川有光)'이라고 현인(賢人)이 지나간 곳에는 산과 내도 빛이 난다고 전해진다. 산천도 빛나게 하는 인물과의 인연이 없다면 그런 도시는 결코 유명한 도시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연환경의 아름다움 말고도 과천에는 어진 인물들과의 깊은 인연이 있으니 바로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과 추사 김정희와의 관계가 매우 깊다. 조선 500년, 과천과의 인연이 깊은 어진이들이 많기도 했지만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 19세기 동안 인물로는 다산과 추사를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다산과 추사는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던 학자였고 동아시아에서도 윗자리에 있던 석학이었다. '정약용은 재주와 학문이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 경전·사서(史書)·제자백가 이외에 천문·지리·의약·잡방(雜方)의 책까지 넓고 정밀하게 꿰뚫어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13경(經)에 대하여 모두 새로운 학설을 세워 저술한 책이 집안에 가득하였다. '흠흠신서'나 '목민심서'와 같은 책은 모두 수사와 재판을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문자이다. 추사 김정희와 견주어도 재주가 높고 실학에 대한 업적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세의 일인자일뿐 아니라, 중국의 학자들과 비교해도 기효람(紀曉嵐)·완운대(阮雲臺)의 아래에 세우면 불만일 것이다'.(홍한주 '지수염필')라는 글에 다산과 추사는 병칭되고 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당시의 학자들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는 다산과 추사가 그렇게 큰 학자였음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신유년(1801) 겨울에 과천(果川)의 주막집에서 너의 어머니가 너를 안고 나를 송별해줄 때 너의 어머니가 나를 가리키면서 저분이 너의 아버지다'라고 하니 너도 따라서 나를 가리키면서 '저분이 우리 아버지다'라고 하였으니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아버지라는 것도 너는 실제로 알지도 못하고 하던 소리였으니 그것도 슬픔을 자아내게 하던 일이었다'.(농아 애도문)
'농아'라는 다산의 막내아들이 네살(만 2년10개월) 나이로 죽었다는 소식을 귀양지에서 듣고 그를 애도해주는 글을 지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1801년 봄에야 모략과 중상으로 천주학쟁이라는 누명을 쓰고 경상도 포항 근처인 장기로 귀양 갔다가 늦가을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재수사를 받고 혐의가 없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면서 가족들과 과천의 주막집에서 헤어지던 장면에 대한 슬프고 애처로운 사연이다. 과천의 주막집이 지금의 어디쯤인가는 알 수 없지만 과천은 바로 다산이 귀양 갈 때 가족과 헤어진 마지막 장소였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글이다. 그런 곳을 찾아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면 어떨까. 무도한 권력이 어진이를 탄압했던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상징적 조형물로 말이다.
추사와 과천의 관계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만년에 4년여 동안 '과지초당'에서 살았고, '과로(果老)'라는 호를 사용하며 과천 노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곳이다. 이제 추사는 많이 현양되고 있으며 시민들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어진이가 과천에서 살았으니 우리 과천시민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추사는 다산의 막내아들과 동갑내기, 그들은 매우 친하게 지냈다. 24세나 연상이던 다산, 이제 추사처럼 다산을 현양하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다시는 무도한 권력이 현인을 탄압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라도 비애의 땅 과천에서 다산을 기려보면 좋겠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