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시설 장기방치 안전위협
세입자 요구에도 관리업체는 손놔
건물 외벽·내부 등 안전진단 필요
특별법 개정, 지원 전환점 여부 주목
"지난해부터 건물 외벽이 여러 차례 무너져 내렸는데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입니다. 장마철이 지났는데도 집 내부와 복도에 어디서 생긴지 모르는 물이 지금까지 떨어지고 있어요."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한 빌라에서 만난 강민석(55)씨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미추홀구 등지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 행각을 벌인 속칭 '건축왕' 남헌기(63) 사건의 피해자다.
이 빌라엔 세입자 70가구가 살다가 법원 경매 등으로 10여 가구가 전세보증금도 못 받고 짐을 싸서 떠났다. 지난 6일 오후 만난 강씨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10층의 한 집으로 안내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이 금세 따끔거렸다. 거실과 방 벽면을 뒤덮은 검은 곰팡이 때문인 듯했다. 소파만 덩그러니 남은 거실의 천장은 구조물이 흉물스럽게 뜯겨져 나가 있었다.
천장 쪽 배관 주변에는 석회 물질이 흘러 동굴 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종유석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세입자의 수리 요구에도 관리업체는 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빌라에선 폭우가 내린 지난 7월 일부 외벽 자재가 떨어져 나가 가스배관이 손상되기도 했다.
강씨는 "도저히 이곳에서 살 수가 없었던 세입자는 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채 작은 월세집을 구해 나갔다"며 "건물 외벽과 집 내부 모두 안전이 우려되는 만큼 안전진단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남씨로부터 전세사기를 당한 또 다른 피해자들이 사는 미추홀구 주안동 한 오피스텔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10월 기계식 주차장이 고장난 채로 장기간 방치돼 있었다.
최근에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참다못한 피해자들이 돈을 모아 고쳤다.
담당 구청인 미추홀구는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 공동주택은 가구 수가 적어 현행법상 의무관리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수 등을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세입자 최미려(49·가명)씨는 "대출을 받고 우선매수권을 써서 경매에서 전셋집을 낙찰받았는데도 여전히 공용시설이 고장 날 때마다 관리업체를 바꾸거나 조치를 할 수 없다는 것에 너무 무기력해진다"고 하소연했다.
최근 전세사기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전세사기가 발생한 공동주택을 지자체가 관리할 수 있게 됐고, 구청에서도 안전이 우려되는 공동주택을 지원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9월5일자 6면 보도=전세사기 특별법 지자체 역할강화… 미추홀구, 피해자 지원 대책 마련)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건물의 안전진단, 관리업체 제재 등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바란다.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장은 "11월에 특별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피해 전셋집을 경매에서 낙찰받아 피해자들에게 장기 임대로 제공하게 된다"며 "피해를 회복할 때까지 전셋집을 떠날 수 없는 이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