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7년 남짓 활동… 남긴 족적은 '뚜렷'
초인적 한국문화연구 업적의 양과 질 상당
내동교회 문고 복원으로 기념사업도 희망
랜디스가 1890년에 내한하여 1898년 4월 과로와 감염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불과 7년 남짓이지만 의료와 사회봉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그는 1890년 가을에 제물포에 도착한 날부터 진료를 시작했는데 1892년 3천594명, 1894년에는 4천464명의 환자를 치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인천에서 1891년부터 야간 영어학교에서 3시간씩 영어를 가르쳤으며, 별도로 고아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을 보살폈다. 랜디스는 성누가병원이라는 이름 대신 '낙선시병원(樂善施病院)'이라 부르자 했는데 선한 일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그의 소명의식이 담긴 것이었다.
랜디스는 한국문화연구 성과도 남겼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이듬해부터 구어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한국인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한자와 한문 지식도 상당했다고 한다. 이 같은 언어능력을 바탕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비롯하여 불교와 무속, 자연 숭배와 민간신앙, 동학의 이념, 한국의 전래동화와 동요 등과 같은 사상과 문화, 동의보감 번역과 같은 전통의료 등에 대한 연구를 해나갔는데, 코리아 리포지터리, 모닝 캄 등의 영문잡지에 기고 발표된 논문만 24편에 달한다.
이 같은 랜디스의 한국학 연구가 불과 3~4년간 진료소와 고아원 운영과 함께 이룬 것이니 한국문화와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초인적인 데가 있다. 랜디스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리차드 럿(Richard Rutt)은 랜디스를 '초창기 한국학 개척자(An Early Koreanologist)'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업적의 양과 질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있다.
랜디스의 한국학 성과는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인천학 혹은 인천문화연구였다는 점이다. 랜디스의 저작 가운데 강화도 역사 연구와 개항기 염색문화연구, 굿 연구의 자료는 당시 인천 지역의 자료를 수집 분석한 것으로 보인다. 랜디스는 '소년과 새끼줄 이야기' 등 16편의 전래동화를 수집·번역하였으며, '가랑머리 칭칭' 등 18편의 전래 동요를 알파벳으로 음사(音寫)하고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했다. 랜디스가 번역한 동화 중 '사냥꾼의 세아들', '가난한 양반 이야기', '지혜로운 화가', '해와 달 이야기' 등 적어도 4편의 이야기는 랜디스가 그의 고아 소년들이나 인천의 다른 아이들로부터 듣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랜디스의 한국학 연구는 인천문화 연구의 기원이기도 한 것이다.
랜디스 기념 문고의 연혁도 밝혀졌다. 랜디스기념 문고(Landis Library)는 랜디스가 남긴 300여 권의 개항기 한국학 자료들이다. 본래 랜디스 사후 성공회 인천 내동교회에 설치되었다가 1903년 서울 정동에 있던 왕립아시아 학회 한국지부에 대여형식으로 이관했다. 이 자료들은 1941년 일제가 선교사들을 추방할 때 연희전문에 위탁되었는데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이 보존 중이어서 문고를 복원할 단초가 생긴 것이다.
랜디스 한국학연구는 개항장 제물포의 가난한 조선인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한국인의 정서를 깊게 이해하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채록한 동화와 동요는 고아원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인 동시에 개항기 인천에서 유통되던 구비문학의 일부였으므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이런 연구가 성공회 내동교회에 설치되었던 랜디스 문고가 복원사업으로, 또 의로운 의사이자 인천학의 선구자인 랜디스를 기념하는 사업과 함께 추진되기를 희망해본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