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옥중 비망록 '장동일지'
재일동포 이철, 간첩 누명 옥살이
무죄선고·정부사과 후 발간 결심
조국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간첩 엮은건 정권이지 민족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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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옥 출판인
'1967년 일본 주호대학에 입학했는데 4·19 때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한국영화를 보여줬다. 나는 '7년이나 지난 영상을 보여줘서 뭘 어쩌자는 거지?'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50년 전 이야기라도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고문당해 연못에서 의문사하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사형 집행된 사람도 많고…. 대한민국이 민주사회로 이행되고 있구나 했는데 지금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니, 우리가 마음을 놓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고통과 아픔은 현재적 의미라는 걸 깨닫게 된다'.

지난 4월 출간된 '장동일지'(서해문집)는 우리가 얼마나 엄혹하고 야만적인 현대사를 통과했는지 경각심을 던져주는 옥중 비망록이다. 지은이 이철(李哲·76)은 재일한국인으로 조국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1973년 고려대학교로 유학 온 청년이었다.

그러나 시절이 너무 안 좋았다. 박정희의 독재가 극악해지면서 벌인 일련의 간첩조작 사건에 그도 걸려들고 말았다. 1975년 11월25일 유신정권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발표 후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다. 약혼자와 장모를 데려와 그의 앞에서 '그짓'을 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며 정신이 무너졌고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39일만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수로 3년6개월을 포함해 13년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13년간 한국에 입국금지가 되었다. 결국 한국에서 살겠다는 꿈은 좌절되었고 오사카에서 낮에는 전기기술자로, 밤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왔다. 책 출간을 계기로 올해 잇달아 한국을 찾고 있는 그는 9월3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 책 내용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형수 생활을 가볍게(?) 증언하려 애를 썼다. 얼굴의 깊은 주름은 지난날의 형극(荊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부인 민향숙 여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민 여사는 "지금도 '간첩'이라는 누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과거를 떠올리려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나고 머리가 하얗게 된다"고 말했다.

이철 선생이 원고를 써놓은 것은 1995년. "저와 민향숙은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가는 감옥마다 두들겨 맞아서 60까지 살면 장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른여덟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우리가 일찍 죽으면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어떤 험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를 것 같아 글이라도 남겨놓자는 생각에 출소(88년) 7년이 지나 쓰기 시작했다. 발표는 엄두도 못내고 30년간 먼지가 쌓인 상태로 놔뒀다." 2015년 무죄가 선고되고, 2019년 문재인 정부의 사과를 받은 후 비로소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책에서 가장 가슴 졸이는 장면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대목이다. '사형수들은 8·15나 크리스마스가 두렵다. 그때 사형집행을 많이 하니까. 한밤중에 갑자기 나를 호출해서 '마침내 올 게 왔구나'하고 생각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은 갈림길이다. 왼쪽은 사형장이고 오른쪽은 보안과다. 무조건 왼쪽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었다. 나는 3, 4걸음 따라가다가 '나를 달래려고 오른쪽으로 꺾어가다 뭔가 잊은 게 있으니 돌아가자고 해서 사형장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거운 침묵에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어디로 가는 거냐?"고 했더니 "오늘은 8·15인데 좋은 일이겠지"하더라. 저쪽 보안과에서 따라오더니 "축하해!"했다. 그래서 "감형입니까?"했더니 부소장이 "축하해! 감형받아서 알려주려고 불렀다"고 하더라'.

이철 선생은 조국이 원망스럽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런 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한국 사람이 되려고 왔다. 나를 간첩으로 엮은 것은 정권이지 민족이 아니다. 부평초처럼 밖에서 사는 걸 청산하고 뿌리를 찾아 민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가혹한 고문을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저력은 바로 그 정신일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지금, 생생한 육성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다.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