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이철, 간첩 누명 옥살이
무죄선고·정부사과 후 발간 결심
조국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간첩 엮은건 정권이지 민족 아냐"
지난 4월 출간된 '장동일지'(서해문집)는 우리가 얼마나 엄혹하고 야만적인 현대사를 통과했는지 경각심을 던져주는 옥중 비망록이다. 지은이 이철(李哲·76)은 재일한국인으로 조국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1973년 고려대학교로 유학 온 청년이었다.
그러나 시절이 너무 안 좋았다. 박정희의 독재가 극악해지면서 벌인 일련의 간첩조작 사건에 그도 걸려들고 말았다. 1975년 11월25일 유신정권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발표 후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다. 약혼자와 장모를 데려와 그의 앞에서 '그짓'을 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며 정신이 무너졌고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39일만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수로 3년6개월을 포함해 13년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13년간 한국에 입국금지가 되었다. 결국 한국에서 살겠다는 꿈은 좌절되었고 오사카에서 낮에는 전기기술자로, 밤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왔다. 책 출간을 계기로 올해 잇달아 한국을 찾고 있는 그는 9월3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 책 내용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형수 생활을 가볍게(?) 증언하려 애를 썼다. 얼굴의 깊은 주름은 지난날의 형극(荊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부인 민향숙 여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민 여사는 "지금도 '간첩'이라는 누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과거를 떠올리려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나고 머리가 하얗게 된다"고 말했다.
이철 선생이 원고를 써놓은 것은 1995년. "저와 민향숙은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가는 감옥마다 두들겨 맞아서 60까지 살면 장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른여덟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우리가 일찍 죽으면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어떤 험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를 것 같아 글이라도 남겨놓자는 생각에 출소(88년) 7년이 지나 쓰기 시작했다. 발표는 엄두도 못내고 30년간 먼지가 쌓인 상태로 놔뒀다." 2015년 무죄가 선고되고, 2019년 문재인 정부의 사과를 받은 후 비로소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책에서 가장 가슴 졸이는 장면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대목이다. '사형수들은 8·15나 크리스마스가 두렵다. 그때 사형집행을 많이 하니까. 한밤중에 갑자기 나를 호출해서 '마침내 올 게 왔구나'하고 생각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은 갈림길이다. 왼쪽은 사형장이고 오른쪽은 보안과다. 무조건 왼쪽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오른쪽으로 꺾는 것이었다. 나는 3, 4걸음 따라가다가 '나를 달래려고 오른쪽으로 꺾어가다 뭔가 잊은 게 있으니 돌아가자고 해서 사형장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거운 침묵에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어디로 가는 거냐?"고 했더니 "오늘은 8·15인데 좋은 일이겠지"하더라. 저쪽 보안과에서 따라오더니 "축하해!"했다. 그래서 "감형입니까?"했더니 부소장이 "축하해! 감형받아서 알려주려고 불렀다"고 하더라'.
이철 선생은 조국이 원망스럽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런 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한국 사람이 되려고 왔다. 나를 간첩으로 엮은 것은 정권이지 민족이 아니다. 부평초처럼 밖에서 사는 걸 청산하고 뿌리를 찾아 민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가혹한 고문을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저력은 바로 그 정신일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지금, 생생한 육성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다.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