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없이 물장구 칠수 있는 웅덩이
그곳에서는 꺼벙이·둘리가 주인공
늘 소동 일으키지만 작은 승리 거둬
정답 모르지만 질문만으로도 아득
시간이 흘러 내가 만화에 빠질 차례가 되었다. 나는 '보물섬'과 '소년중앙'에 나오는 만화를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아기공룡 둘리' '꺼벙이' '맹꽁이 서당'과 같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이 첫번째 친구가 되어주었다. 월간지의 연재만화는 따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은 고사하고, TV를 틀어도 어린이 프로그램이 한 시간 남짓인 세상에서 오롯이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만들어지는 창작의 세계는 당시에 만화밖에 없던 것 같다.
잡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펼쳐보는 만화는 그때그때 바뀌었지만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이 1위였던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데, 도입부는 한결같다. 학동들이 한바탕 싸우고 깨고 부수고 말썽을 부린다. 훈장님이 기다란 담뱃대로 학동들의 머리통을 내리쳐서 커다란 선인장 같은 혹을 만든 후 "이제 공부하자"며 책을 펼친다. 그러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조르고, 훈장님은 우리나라 역사나 한자 고사성어 같은 것을 풀어서 술술 들려준다. 심지어 마당쇠도 같이 듣는다. 마당쇠는 아이와 어른, 무책임과 책임의 중간자적 존재다. 거의 어른이지만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도 있고, 훈장님이 없을 때 엉터리로 가르치기도 한다. 만화를 읽다보면 조선시대 서당의 맨 뒷자리에 앉아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결초보은(臥薪嘗膽)' 같은 사자성어를 어깨너머로 배우는 느낌이 든다. 길창덕의 '꺼벙이'와 신문수의 '로봇 찌빠'도 좋아했는데, 사람이나 로봇이나 눈꺼풀이 반쯤 내려온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 꺼벙해 보일 수밖에. 찌빠는 로봇이지만 할 줄 아는 기능은 별로 없다. 중요한 점이 파리채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파리채가 달린 로봇이라니! 그러고 보니 꺼벙이 머리에는 땜통이 있었다. 생각만해도 웃음이 나오기 때문에 이 장르의 이름이 '명랑'인 것일까?
각설하고, 그런데 왜 '명랑만화'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명랑'의 사전적 의미는 '흐린데 없이 밝고 환함'이다. 명랑만화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세계, 커다란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세계이며 가장 어린 독자를 타깃으로 삼는다. 혹자는 군사정권시대에 유독 강조된 말이 '명랑'이었다며 경제성장과 더불어 정치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됐다고 말한다. 당시에 '명랑운동회'와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 유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다 떠나서, 만화의 장르를 '명랑'이라고 명명한 것에 주목한다. 내가 아이였을 때 '명랑만화'는 부담 없이 뛰어들어 물장구를 칠 수 있는 즐겁고 작은 웅덩이였다. 그 곳에서는 꺼벙이나 둘리같은 아이가 주인공이다. 덜렁거리고 모자라거나, 말썽을 많이 피우는 아이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래야 비눗방울이 불어나듯 이야기의 기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아이 옆에는 항상 친구가 있고, 그들은 늘 소동을 일으키지만 언제나 작은 승리를 거둔다.
'명랑만화'를 통과한 후 나는 '순정만화'로 넘어갔다.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순정만화'의 별자리를 톺아보려면 두배의 지면이 필요하니 생략하자. 의문은 어떤 장르의 이름이 '명랑'이고 '순정'이었다는 데 있다. 누가 이 장르의 이름을 지었을까? 이 장르의 대표 정서가 '명랑'이며 '순정'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정답은 모르지만 질문만으로도 아득해진다.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어려워진 이들에게, 내 마음 속에 희미한 인상으로만 남은 명랑만화의 등장인물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유년기에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남아준 너희들은 참 고맙고 특별한 존재였다고.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