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발견한 오래된 사진 한 장
친구와 사진 속 식당서 만나 울컥
우울한 시간 지나보니 무책임해져
"다 지나갈 거야, 겪어보니 그래"
"그거, 산후우울증이야. 다들 그래."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쉽게 생각했다. 곧 나아지겠지. 남들도 다 그랬다는데, 뭘. 유난인 척하기 싫어서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가만 긴 밤을 보냈다. 산후우울증이 저절로 괜찮아진 건가,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건가 판단하지는 못했으나 나는 말수가 준 사람이 되었고, 온종일 창밖 한 번 내다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산다니까 이런 삶도 나쁘지 않은 건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고 그랬던 어느 날, 나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웃음이 쿡 터졌다. 뭐 이런 사진을 다 찍었지? 사진 속 그날은 친구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단골 실내포차에서 만났다. 산오징어회를 만이천원에, 소라탕을 만오천원에 팔던 실내포차 이모는 우리에게 참말 살가웠다. 사실 우리 빼고는 손님도 없던 식당이었다. 천장이 낮은 식당이 들썩들썩 할 만큼 우리는 소란스럽게 놀았다. 이모는 쉴 새 없이 낙지를 볶고, 잔치국수를 끓이고, 소라탕에 소라를 더 넣어주었다.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 갑질이 몸에 밴 상사 이야기, 시집 안 가고 뭐 하냐 맨날 욕하는 엄마 이야기 등 할 말은 많고도 많았다. 참 이상하지. 화났던 일도, 슬펐던 일도 떠들고 나면 다 괜찮아졌다. 누군가는 훌쩍이고, 누군가는 코를 풀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다. 춤을 춘 친구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술값이 상당히 나왔지만 생일을 맞은 친구는 통 크게 혼자 결제했다. 우리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각자 생일마다 술값을 결제할 것이니까 미안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던 거다. 식당을 너무 어질러놓은 것 같아 몇 번이나 식당 이모에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외쳤다. "자주 오기만 해! 다음에 오면 서비스로 닭똥집 맛있게 볶아줄게!" 이모는 골목까지 나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사진을 본 날, 하도 마음이 싱숭생숭해 나는 친구와 그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년만에 만난 이모가 나를 덥석 안아줘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뻔도 했다. 산오징어회에 소라탕을 먹었는데, 어쩌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다 변한 것도 같고 어쩌면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아서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별로 행복하지 않은 밤이었다고 기억한다.
역시 살아본 사람들의 말이 맞았던 건지, 우울했던 시간은 끝났다. 그래서 나는 좀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다. 당장 힘든 친구에게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내가 겪어보니까 그래" 그렇게 말하는 사람 말이다. 아기는 쑥쑥 자라 열 살이 되었고, 나는 예전처럼 아무 데로나 쏘다녀도 되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딸에게 말했다. "엄마 다다음 주에 여행 가. 길게는 아니고 2박3일. 잘 지내고 있을 수 있지?" 저를 빼놓고 간단 소리에 단단히 삐쳤다. "또 어딜 가! 맨날 나 두고서!" 나는 풉풉 웃었다. "너도 알겠지만, 엄만 원래 먼지였다? 저기 우주에서 먼지로 떠돌다가, 진짜 어쩌다가 지구에 불시착을 했다고. 이왕 온 지구, 가볼 덴 다 가봐야지. 안 그래?" 뾰로통해져선 제 방문 쾅 닫고 들어간다. 그래봤자 월드콘 하나에 풀어질 거면서. 나는 여행 가방이나 챙겨야지.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