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작물 헤집고 마을까지 내려와
생존권·생태계의 원리 지켜져야
최고 권력·이익 독점 날뛰는 행동
이제는 사회 공적 영역 무시 독주
민주주의 붕괴 임계점 넘으면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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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환 가톨릭대 명예교수
이맘때 농촌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멧돼지 난동이다. 애써 가꿔놓은 배추밭이며 각종 농작물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마을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사실 멧돼지야 무슨 죄가 있을까. 먹이가 부족하니 그렇기도 하고, 새끼 멧돼지를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하니 나름대로 돼지의 사정도 이해할만하다. 그렇지만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거나 애꿎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멧돼지를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다. 서식처를 파괴당한 야생동물이 사람이 사는 영역으로 침입하면서 생기는 각종 문제를 무시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상태가 된지 오래지 않은가. 인수공통 바이러스 문제로 초래된 코로나19 사태를 생각해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야생동물의 생존권은 자연정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결국 서로의 생존권을 보장하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생태계의 자연 원리를 지켜내는 것이 관건이다. '정의'란 말이 '각자에게 각자의 정당한 몫을 주는 데 있다'라는 오랜 철학적 규정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언제나 과도한 욕심과 지켜야할 자연규범을 어기는 무모함에 있다.

멧돼지의 난동이 어디 생태계에서만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무모하게 날뛰는 멧돼지들이 너무도 많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과거의 성공이 현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세계 최저의 빈곤상태를 넘어섰을뿐 아니라, 동시에 그 안에 담겨있던 개발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뤄낸 그 힘이 지금 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그 물질적 성공을 틈타 우리 사회의 최고 권력과 이익을 독점한 이들이 아예 이렇게 날뛰는 멧돼지처럼 행동하고 있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거짓과 불법을 동원할뿐 아니라, 조작과 날조는 물론 한없는 파렴치한 행태로 온 사회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다. 권력과 자본을 독점한 이들의 횡포가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이제는 아예 사회의 공적 영역을 깡그리 무시한 채 독주하고 있다.

이런 멧돼지의 난동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농촌의 멧돼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주가를 조작해 엄청난 불법적 이익을 남겨도, 명품 가방을 뇌물로 받아도, 각종 인사는 물론 선거 공천에 불법적으로 관여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월권적 행위로 사람이 죽어도 '그까짓 걸로 처벌하면' 안된다. 마약을 불법반입해도 오히려 이를 감시하는 사람이 불이익을 받는다. 매정하지 못해서 그랬다지만 반대편에게는 끝없이 매정하다. 이를 감시하고 처벌해야할 법은 같은 편이 되어 적에게는 너무도 세심하면서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한없는 관대함을 보인다. 이들 멧돼지 집단은 우리 사회에 자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멧돼지들이 난동을 부릴 자유인 듯하다. 멧돼지 집단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돼지들처럼 다른 시민들보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다. 이 난동을 고발해야할 언론은 두려움과 이익 때문에 아예 그들 편으로 돌아섰다.

멧돼지가 힘을 발휘하니 모두들 멧돼지가 되려 한다. 한 때 이 나라를 섬나라가 지배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때 우리가 섬나라 멧돼지 국민이었고 나라도 발전했다고 떠든다. 그러면 지금의 난동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멧돼지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우겨댄다. 배운 멧돼지들은 비판은커녕 오히려 과거의 폭력과 야만적 식민시대를 미화한다. 이 난동을 정당화하고, 계속 그 특권과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다.

수많은 다른 시민들도 자신의 작은 영역적 이익과 파당적 정치 견해에 얽매여 덩달아 이들을 옹호한다. 멧돼지 같은 맹목적 이익 집단에 의해 민주주의와 시민의 정치사회적 자유는 하염없이 퇴행하지만 내 배추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태계가 붕괴되는 임계점이 있듯이 민주주의와 자유에도 붕괴의 임계점이 있다. 이를 넘어서면 우리 모두가 침몰한다. 지금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체와 공동선을 지켜내기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곧 이 멧돼지 집단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파헤쳐 놓을 것이다.

/신승환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