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곳곳에 스민 공동체 슬픔 노래하는 그림들
슬픔 거쳐 애도와 추모 지속하는 ‘사회화’ 제안
19일까지 인천 중구 ‘임시공간’
재난과 참사로 인한 공동체의 슬픔과 애도의 감정의 담은 회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치명타 작가의 개인전 ‘반도 엘레지’가 인천 중구에 있는 ‘임시공간’에서 진행 중이다.
작가의 신작 회화 8점을 펼친 이번 전시는 재난, 참사의 공동체적 회복을 방기하고 나아가 진실을 은폐하는 한국 사회에서 애도와 추모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 겪는 슬픈 감정에 집중한다. 애도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엘레게이아(Elegeia)에서 유래한 ‘엘레지’는 주로 문학과 음악에서 슬픔을 담아 표현한 작품을 일컫는다.
작가는 슬픔을 노래하고 죽은 이를 애도하는 ‘엘레지’라는 정서를 통해 사소한 개별 감정으로 폄하됐던 슬픔을 불가결한 공동체적 추모 과정으로 견인하고 있다. 작가는 슬픔의 단계를 밟아가며 다양한 종류의 슬픔을 마주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 어떤 방해와 기망에서도 끝내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 힘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메시지가 적힌 메모지(혹은 포스트잇)를 그린 그림들을 먼저 만난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거나 입을 앙다문 얼굴들을 마주하고, 빈 메모지 더미에 덮여 있는 알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여러 색상의 ‘노란 리본’들을 매단 검은 색 배낭을 멘 여성이 군중 사이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마치 질문을 하듯 관람객과 눈을 마주친다.
치명타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그의 그림들에 담긴 감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저자는 ‘유가족이 쇼크, 분노, 긴 슬픔과 우울 상태의 시기를 거쳐, 드디어 (…) 고인의 유지를 깊이 듣는 때가 온다. 그리고 고인의 유지를 사회화하기 위해 슬픔을 가슴에 안고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고 서술했다. 책을 읽고서, 이러한 슬픔의 과정이 어쩌면 유가족에게만 국한된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추모 집회와 기억 행사에서 만났던 시민들이 참사로 인한 상처를 고백할 때 울고, 분노하고,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재난 참사를 오랜 작업 주제로 다루며, 참사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는 시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어떤 슬픔의 단계를 지나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이제야 추측해 본다.”
작가는 유가족이 가족의 상실을 단계별로 받아들이고 슬퍼하며 끝내 ‘사회화의 단계’로 나아가듯, 애도하는 이들도 슬픔의 다양한 단계를 겪고 견디며 기억을 지속하게 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사회화의 단계로 들어서 ‘재조직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반도 엘레지’는 사회적 재난, 참사를 애도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슬픈 감정을 ‘엘레지’의 정서로 다룬다. 작가는 슬픔의 종류와 단계를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슬픔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기억과 추모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서 슬픔을 마주하길 제안한다.
이번 전시는 오는 19일까지다. 전시는 11월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서대문구 미학관에서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 ‘반도 엘레지, 레퀴엠’과 연결된다.
곧 10·29 참사 2주기가 다가온다. 이번 전시와 함께 읽으면 좋을 글을 권한다. ‘황해문화’ 2024년 가을호(통권 124호) 비평란에 실린 최성용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의 ‘10·29 이태원 참사의 사회적 애도와 기억을 위하여’다.
최성용은 이 글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유령처럼 분장을 하고서 핼러윈 축제마다 돌아올 죽은 자들과 함께 핼러윈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축제는 이윽고 문란함의 의미를 전복한다. 문란하기에 죽은 것이 아니다. 문란한 자들의 카니발이야말로 참사의 정확한 애도 의례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풍기문란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이태원의 애도되지 못한 수많은 죽음까지도 되살아나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