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문학과 러 크로포트킨
이상의 '날개'·이효석의 자연주의
'채식주의자' 사상·인물 연상케 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한국문학 오랜 전통에 맺혀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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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문학의 원천을 한국문학 안에서만 찾는 것 좋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내부’라는 관념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 그런데 이런 때,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었을 때, 한번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는지 찾아보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리라.

이번주에는 강원도 춘천 김유정 고향 실레 마을을 간다. 주제가 김유정 문학과 크로포트킨. 그는 러시아 짜리즘 시대와 10월 혁명 이후를 살다간 혁명가요, 또한 생물학자이기도 했다. 십년 전 김유정 학회에서 발표를 할 때, 이 크로포트킨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었다. 김유정 친구 작가 안회남은, 김유정이, 인류의 역사는 김유정식 짝사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 김유정은 다윈과 맬서스 대신에, 그리고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중요해질 거라 했다. 김유정은 투쟁보다는 사랑을 중시하는, 그러니까 크로포트킨주의자였다. 그는 경쟁보다 연대가, ‘mutual aid’가, 생명체 진화에 관건이라고 믿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와 ‘육식성’의 대비법은 어딘지 모르게 ‘크로포트킨적’이다. 김유정의 시대처럼 우리 시대는 여전히 ‘생존경쟁’을 과도 숭배하는 다위니즘의 신봉자들이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강의 ‘채식주의’는 다위니즘에 대한 현대판 저항이다.

이 ‘채식주의자’ 속 연작의 두번째 단편소설 ‘몽고반점’에 등장하는 채식주의자 영혜의 형부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날개 달린 것들을 삽입시키고는 하는데, 이는 한강이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를 반드시 의식하고 참조했음을 의미한다. 작중에서 형부는 어린 아이의 순수를 간직한 영혜와 관능적인 관계를 맺는데, 이것은 분명 상징적 행위다. 형부는 광주 5·18의 상처와 후기자본주의의 문제를 그리는 저항적 예술가의 단계를 넘어, 3층 베란다에서 마치 날개를 가진 존재처럼 날아오르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 이점에서 형부는 현실의 중력에 맞서 예술의 날개로 비상하고 싶어했던 소설 ‘날개’의 주인공 ‘나’의 현신이다. 이 시대는 작가 이상의 시대처럼 예술이 짓눌려 신음하는, 현실원칙을 숭배하는 속인들의 시대다. 우리는 중력법칙에 반해 날아오르고자 하나 ‘이카루스’의 날개는 좌절을 예비한다. 새가 되려는 충동만으로는 이 세계를 상대할 수 없다.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연작은 ‘나무 불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처절한 변신의 ‘로망스’다. 나는 이 작품에서 이효석 특유의 독특한 자연주의, 저 ‘산’, ‘들’, ‘소라’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강렬한 자연에의 동화를 연상한다. 이 중 짧은 소설 ‘산’의 주인공 중실은 주인의 핍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다. 좋은 주인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요, 도회지로 나가 날품팔이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아닌, 산으로 올라가 나무와도 같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판 ‘자연인’ 중실은 산속에서 나무들과 함께 한 계절을 보내는 사이에 자기도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물들어 버린다. ‘두발은 뿌리요, 두팔은 가지다. 살을 베이면 피 대신에 나무진이 흐를 듯하다’. 한강의 영혜보다 먼저 한국문학에는 이효석의 주인공 중실이 있어 나무가 ‘되었다’. 이효석은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욕망조차도 죄에 물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강 문학은, 그러니까 평지돌출, 사막과 황원에 옮겨 심은 나무나 꽃이 아니요, 한국문학이라는 오랜 전통의 나무에 맺혀 핀 꽃이요, 열매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의 전통을 돌아보게 한다.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이 되는 플라시보 약이라도 삼켜버린 것 같다. 그러나 한갓 심리 효과는 아니다. 한국문학은 하나의 실체, 남들이 보지 않는 산 숲에 뿌리 내리고 있던 하늘 높이 줄기 뻗은 나무였다. 이제 이 나무가 높이 커서 제 가지에 피어난 탐스러운 꽃 한송이를 내어 보였다 하자.

한강 문학의 이념적 지표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논의들이 오간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바라던 소식은 완전히 둥근, 관념적인 이상의 형태로 날아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강이라는 한 구체적인 살아 있는 작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