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한국미술관 권갑하 그림전
고요함·역동성 담긴 '미학적 전율'
사물 존재론 한참 들여다본 '연작'
외적 관찰과 내적 침잠 동시 탄생
언어 예술을 통한 존재 양상 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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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시조시단의 중진 권갑하 시인의 '마음꽃 달항아리' 그림전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달항아리는 조선 백자의 특징인 온화한 흰빛과 유려하고 원만한 곡선 형태를 갖춘 예술품으로 유명하다. 매력적 볼륨과 질감, 공간감을 견지하여 많은 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왔으며, 해외에서도 도예가들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그림전은 이처럼 아름다운 달항아리를 때로 사실적으로, 때로 변형된 색상과 형상으로 그려낸 결실들을 풍요롭게 품고 있다.

권갑하의 그림에는 여백의 미를 살린 사례들도 있고, 현대성을 여러 차원으로 갖춘 실례들도 많다. 이 그림들은 달항아리의 구체적 존재론을 온전하게 재현하면서 감각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다. 다양한 미학적 전율을 생성하면서 고요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달항아리의 궁극적 존재증명을 예술적으로 수행해간다. 아름답고 단단한 의장들이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게 번져가는 예술적 파문 속에서 한없는 울림과 떨림을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시인은 달항아리 연작 시조를 꾸준히 써왔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그로부터 얻은 감동을 갈무리하면서 그 정점의 순간을 시조로 담아온 것이다. 시조가 응축과 긴장의 방법론을 통해 사물과 마음 사이의 순간적 점화를 첨예하게 수행해온 양식이라는 점에서, 권갑하 시조는 특별히 사물의 구체성과 그에 대한 시인의 실물적 감각을 함께 풍요롭게 담고 있다. 그럼으로써 달항아리와 거기서 비롯한 예술적 전율의 순간은 선명한 자리를 얻고 있다.

시인은 달항아리에서 '빈 듯 가득 찬 듯/거룩한 적막'('달항아리-혼빛')을 읽어내고 '헛헛한/마음의 소요/귀 따가운 저 묵언'('달항아리-고요')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결같이 적막과 묵언이라는 달항아리 특유의 고요한 형상을 부조한 것이다. 또한 시인은 '허기마저 내색 않는/묵묵한 저 기품'('달항아리-청빈')이나 '촘촘히/가슴에 새긴/경전 같은 저 말씀'('달항아리-실금')처럼 윤리 지향의 흐름도 추출해낸다. 나아가 '주는 듯 너그럽고/받는 듯 느긋하게'('달항아리-자적') 하는 여유, '흰 가슴/검게 금이 간/울 아버지 속울음'('달항아리-맨살') 같은 생애, '안으로/불을 켜 드는/견고한 고독의 꽃'('달항아리-자존') 같은 외따로움, '마음의 첩첩산중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달항아리-독락')는 유적의 속성 등을 비유적으로 입혀간다. 이 모든 형상이 언어예술로서 어떤 극점을 이룬 사례들일 것이다.

이처럼 권갑하의 달항아리 연작은 사물의 존재론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서 외적 관찰과 내적 침잠의 과정을 동시적으로 탄생시킨 역작들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사물의 항구성과 순간성을 통합적으로 형상화하고,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예술을 통해 사물의 미세한 존재 양상을 근원적 언어로 채록하였다. 언어를 넘어선 역동의 고요를 포착하면서, 언어가 숨을 멈추고 사물이 육체를 얻어 발화하는 순간을 새겨간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사물의 모습은 드러내고 자신의 마음은 은근하게 숨기는 작법을 취하면서 달항아리의 본질에 직핍해가는 목표를 단숨에 성취하였다.

궁극적으로 권갑하의 그림과 시조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종속물로 떨어지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번안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시인이 이 두 가지 양식으로 하여금 서로 대등한 수평성으로 친화하게끔 하는 데 예술적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화폭을 통해 존재자의 한순간을 담아내고, 한편으로는 언어를 통해 사물의 개별적 외관과 속성을 그려간 것이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조와 발견을 통해 삶의 지표를 유추하고 성찰해온 시인의 마음이 담기게 될 격조 높은 이번 그림전에 커다란 축하와 응원의 말씀을 드린다. 이로써 한국 시조는 융합예술의 한 경지를 얻게 되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