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과정·운행 상황·노동자 등 담겨
당시 인천 랜드마크 '알렌 별장' 선명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허종식(민·인천 동구미추홀구갑) 국회의원실이 24일 공개한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 소장 자료(보스트윅 후손 기증 자료)를 보면, 인천 지역 경인철도 건설 과정과 운행 상황을 살필 수 있다.
경인철도 건설사업에 참여한 미국인 해리 라이스 보스트윅(Harry Rice Bostwick·1870~1931)이 남긴 자료들이다.
경인철도 건설현장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흥미롭다.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현 경인선 도원역 부근)에서 가진 경인철도 기공식 현장 인근에 있던 당시 인천의 랜드마크 '알렌 별장'의 선명한 사진도 이번 기증 자료에서 발견됐다.
1900년 7월 나온 '경인철도 안내서'는 사료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철도 운행 시간표와 철도를 탈 때 주의사항 등이 담겼다. 인천역에서 오전 6시, 7시45분, 10시45분, 오후 1시45분, 4시45분으로 하루 5차례 서울행 열차가 출발했다. 경성역(1900~1904년 경부선·경인선 종착역이던 서대문역)까지 1시간45분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역은 인천역~축현역(동인천역)~우각동역(현 도원역 부근)~부평역~소사역(부천역)~오류동역~노량진역~용산역~남대문역(서울역)~경성역(서대문역) 등 10개였다. 인천~노량진까지 개통된 시점이 1899년이고, 한강철교가 준공된 때가 1900년 7월이었던 만큼, 열차 시간표를 새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서를 보면, 부정 승차를 하면 거리와 상관없이 추가 요금 5전(일본 화폐)을 내야 하고, 4세 이하 어린이는 무임, 4~12세까지는 성인의 반값으로 승차권을 살 수 있었다. 짐을 분실하더라도 책임지지 않지만, 옷이 훼손될 경우 최대 50원까지 변상해 준다는 내용도 있다.
1인당 30㎏의 짐을 초과하면 추가 운임을 내야 했다. 당시 경인철도가 여객뿐 아니라 물류 기능도 상당 부분 담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