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악보다 착한 사람이 수수께끼
결핍 없이 자랐다고 선해지지 않아
부부가 황금 어떻게 쓰는지 보고프면
행운의 여신이여 숫자 빼먹지 말고
여섯 자리를 고대로 점지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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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살다보면 친척은 아니지만 친척과 유사한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시댁인 속초에 갈 때마다 만나는 가족이 있다. 아이들끼리 노는 궁합이 잘 맞아 명절이나 방학에 속초에 가면 부러 시간을 만들어 한나절을 보낸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깊은 인상을 주었다. 보기 드물게 선한 사람들이라고 할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은 아니나 동네의 홍반장 노릇을 하며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이웃들을 살뜰히 챙긴다. 폭설에 제설작업이 미진한 골목길은 알아서 치우고, 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서서 돕는다. 부부가 한마음으로 팀워크를 발휘하는데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성격이라 나 같은 느림보가 보기에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다양한 일을 척척 해낸다.

내게는 착한 사람들이 수수께끼다. 악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사랑의 부족과 결핍으로 인해 뒤틀린 인격, 자신에 대한 미움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내는 투사, 악의 플롯은 진부하다. 대체로 비슷비슷한 서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반면 결핍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반드시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칫 타인의 불운에 무지해질 우려, 자기가 누려온 것들을 당연시한 나머지 악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으니까. 무탈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비밀과 그늘이 없어 실존의 그림자가 옅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신기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힘든 성장기를 보냈는데도 주변에 밝은 빛을 드리우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종교인도 아닌데!

여기 선희(가명)네가 그렇다. 이 부부는 둘 다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지나 공짜로 주어지는 것 하나 없는 치열한 청년기를 통과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라는 것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속초로 내려간 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놓은 상태를 말한다. 남편은 에어컨을 설치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겨울에 미리 에어컨을 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고된 육체노동에 속한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 부부가 한 일은 폭염에 에어컨 없이 견뎌야 하는 이웃에 자비로 에어컨을 사서 무료로 설치해주는 봉사활동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찾고?"

"사회복지과에 연락해서 다둥이 집이나 독거노인 혼자 지내시는 곳 열 군데만 추천해달라고 부탁드렸지."

그런데 막상 구청에서는 왜 일을 사서 만드냐는 반응이었다나 뭐라나.

그런 선희네가 복권에 당첨됐다. 여섯 자리 숫자 중에 다섯 개가 맞아 3등을 한 것. 3등 상금은 120만원 정도였다. 그나마도 금방 사라졌는데 부모님들 용돈 드리고 지인들에게 '복돈'이라고 소소하게 선물하여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달 후 선희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래저래 병원비가 딱 120만원이 나왔다고 한다.

"액수가 너무 똑같으니까 약이 오르지 뭐야."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행운과 불운을 관장하는 여신이 있다면 불운에 대해 '선입금'을 한 셈인데, 어리석은 인간이 몰라보고 다 써버렸으니 말이다. 기왕 공돈인데 자기를 위한 선물로 뭔가 하나 사지 그랬냐고 나는 타박을 했다. 그랬더니 겨우 한자리 수만 빗나갔으니 '이번 판은 없던 일로' 하고 싶어지더라는 것이다. 상금을 다 나눠줘서 금방 없애버리고 다음에 제대로 당첨되고 싶다나.

"너희는 1등 당첨돼도 본격적으로 봉사 다니고 이럴걸?"

내가 말하자 친구부부는 우리 그렇게 착한 사람들 아니라고 손을 휘휘 젓는다.

진정한 수수께끼인 착한 사람들. 주변에서 주제넘게 무슨 봉사냐고, 그럴 돈이 있으면 얼른 집이나 사라고 면박을 주어도 한 귀로 듣고 넘기는 이 부부를 보고 있으면 참으로 신기하다. 이 세상은 기브앤테이크의 원리로 돌아가고 세상 이치는 원인과 결과라는 엄정한 인과율에 따른다. 그런데 받은 것도 별로 없는 인생에서 나오는 사랑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타고난 '원단' 차이인가? 그러니 행운의 여신이여, 이 부부가 당신의 황금을 어떻게 쓰는지 보고 싶으면 치사하게 한 숫자 빼먹지 말고 여섯 자리 고대로 점지해주기를. 선희의 바람대로 이번 판은 무르고 말이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