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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는 '회장님네'와 '일용이네' 두 집안 이야기다. 회장님네는 3대에서 4대에 이르기까지, 대가족이 엄부자모인 김 회장 부부를 중심으로 양지바른 마을 '양촌리'를 이상향으로 만드는 이상적인 가족이다. 반면에 보따리 장수로 마을을 찾았다 회장님네의 도움으로 양촌리에 모자 가정을 꾸린 일용이네는 결핍과 상처투성이 가정이다.

회장님네가 업동이를 호적에 올리고 대가족의 소소한 갈등을 사랑으로 품을 때, 일용이네는 동네 사람들과 다투고, 모자와 고부 갈등으로 늘 시끄럽다. 수다쟁이 일용 엄니는 동네 온갖 일에 참견하는 사건의 주역이다. 때로는 이기적인 속물이고 가끔은 정의로운 해결사다. 깊은 속정과 달리 아들과 며느리를 향한 말투엔 정나미가 없다. 일용이의 불 같은 성정도 '엄니'와 같다. 타향에 정착한 모자의 억척이 매울수록 회장님네의 사랑과 평화가 푸근해진다.

전원일기 재방송을 볼 때마다 회장님네 보다 일용이네 에피소드에 집중한다. 생존하려 억척을 떨고 자식을 지키려 극성을 부려야 했던 시대를 '일용 엄니'를 통해 기억해서다. 전쟁과 혁명과 산업화의 여파가 혼재된 전원일기의 시대엔, 한국의 많은 가정들이 일용이네처럼 가족의 결손, 타향살이, 가난 등 크고 작은 결핍을 안고 시끌벅적하게 살았다.

'일용 엄니' 김수미 배우가 25일 사망해 27일 발인식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올해도 방송에서 만났던 얼굴이다. 전원일기를 마친 뒤에도 영화, 드라마, 뮤지컬, 예능의 주·조연을 맡아 쉬지 않았고, 남도의 집밥 솜씨로 홈쇼핑에서 김치와 간장게장도 판매했다. 일용 엄니의 억척이 김수미의 삶에서도 그친 적이 없었다. 전원일기의 스핀오프 예능인 '회장님네 사람들'에서 안주인을 맡아 김 회장 부부를 손님으로 맞았다. 억척으로 일군 일용 엄니의 '역전'이다.

지난해 10월 독사 감독 박종환과 사랑의 시인 김남조의 잇단 타계에 본란에서 '사랑과 독기 말고는 삶을 지탱할 수 없었던 시대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생각한다. 그래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 낼 시대정신을 모색할 수 있다'고 썼다. '일용 엄니'는 전원일기 시대의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가장 닮았다. 또 하나의 시대와의 사별이다. '일용 엄니'도 그 시절 그 시대를 소환하는 기호로 남을 테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