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늘 민족주의적 신화로 덧칠
고종 '개혁군주'·'매국노' 상반 평가
'日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 대학교수
이러한 역사적 쟁점 우리 주변 산적
재해석, 수용·합의로 공동체 통합을
역사는 늘 국가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신화로 덧칠되기 마련이다. 역사적 사실이 과장, 축소, 은폐되기도 하고, 왜곡된 '이름 짓기'가 행해진다. 물론 역사의 신화화는 민족적, 국가적 자긍심과 가능성을 높이는 시도이다. 그러나 역사적 변형이 현재의 정치적 관점을 정당화하거나 현재의 정파적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즉 정치화의 결과물이라면 지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비운의 개혁군주'와 '매국노'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이러한 평가들은 조선의 가혹한 수탈체제를 거론하지 않고, 해방 후 왕정복고는 거론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일본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일본인들의 토지 수탈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다는 근거 박약한 평가도 있다. 조선의 쌀 수출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무역거래였다는 주장과 일방적 수탈이었다는 주장이 공존한다. 우리 독립군의 일본군에 대한 압도적 승전으로 알려진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도 객관적으로 검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더 원천적으로 일본식민지시기를 기존의 일제시대나 왜정시대가 아닌 이른바 '일제 강점기'로 부르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에 의한 병탄 이전에 갑신정
변과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근대적 개혁엘리트세력이 왕조권력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임오군란 이후 군대해산을 거치면서 국가의 군사력이 해체되어버리고, 백성들은 왕조권력에 등을 돌린 상황에서 정작 한일합방 당시에는 일제의 무단체제에 저항할 아무런 잠재력도 없었던 점을 은폐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한 대학교수가 사법적 판단무대에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 매춘'과 '강제동원된 성노예' 사이에서 무엇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둘러싼 재판이었지만, 사법부는 강의중 내용이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에 대해서 무죄로 판결하는 최소한의 개입에 머물렀다. 이 교수는 역사적 진실이 사회적 통념에 반한다는 이유로 형사기소되는 현실을 개탄했고, 고소인인 사회단체는 '반인권적, 반역사적 판결'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결과적으로 법정은 어느 쪽이 역사적 진실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회피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은 정치적으로 비화하기 쉬운 또다른 논란거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쟁점들은 주변에 산적해 있다. 지난 1960~70년대에 제주 4·3사건은 단정반대를 위한 남로당의 폭동이었지만, 민주화 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 새롭게 정의되었다가 최근에는 현 정부의 장관에 의해 '남로당의 정치폭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 귀결된 사건'으로 재정의되었다. 4·3을 포괄하는 복합적 진실은 정치진영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재정의되고 있는 사태를 막지는 못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사회운동이나 198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 역시 순수 민주화운동만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수준과 방향의 사회운동이 서로 결합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서 어느 수준에서 민주화운동의 방향에 합의했었는지를 밝히고 이를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경계를 설정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재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국가공동체의 정치체제 안에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매개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열려진 진실규명과 정파를 넘어선 수용과 합의를 통해 공동체적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복합적인 사실의 편린을 과장, 왜곡, 은폐함으로써 각 정치적 진영의 독선적 입장과 배타적 이익에 부합되는 파편화된 진실을 외칠 때에 대한민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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