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 예쁘게 걸린 아침 달·한가로운 들판
널어놓은 깨 위에 만든 고랑 '추상화' 같아
생각지도 못한 일 일어나는 사람 사는 세상
견디고 이겨내며 하루 살아가는 이들 장해
아내가 나들이 가면서 빨래 다 되면 널라고 한다. 바람이 거칠어져서 거실에 빨래를 널었다. 책을 보다가 잠이 쏟아져서, 낮잠을 길게 잤다. 어제 주워다 삶은 알밤을 다람쥐처럼 앉아 까먹었다. 배불렀다.
자전거 타고 알밤 주우러 갔다. 회관 마당에 점순 어머니가 콩 타작하고 있다. 점순 어머니가 삶은 감자를 비닐 주머니 속에서 꺼내 준다. 따뜻하다. 감자가 든 비닐 주머니 속에 김이 서려 있다. 하나 남은 것도 가져가라고 했다. 두고 갔다. 가을바람과 가을 햇살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그대로 한다. 널어놓고 깨 위를 돌아다니며 두발로 고랑과 이랑을 만든다. 추상화 같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삶이 예술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밤나무 가지가 흔들려 알밤이 많이 빠진다. 생각대로 알밤이 빠져 있다. 밤나무의 생산은 아름답고 나의 수확은 신난다. 저만큼 밤송이가 알밤을 물고 떨어져 있다. 두 발로 밤송이를 열고 알밤을 꺼낸다. 서너 개 주우면 행복한 한주먹이 된다. 밤을 다 줍고 밤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오지 않아도 되겠다.
점순 어머니가 아직도 콩 타작하고 있다. 나무막대기를 양손에 들고 콩대를 투닥 투닥 때린다. 콩들이 콩콩 뛰어나와 톡톡 뛰다가 또르르 또르르 굴러 간다. 콩을 쫓아다녔다. 금방 한 주먹이 된다. 일하는 중간에 올 수 없어 콩 타작 다 할 때까지 콩을 따라다니며 주웠다. 콩 한 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고 했다.
앞산에는 팽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다. 뒷산 그늘이 마을을 덮어 올 때 아내가 왔다. 뒤 안에서 호박잎과 새순을 땄다. 호박잎은 단 한 번의 서리로 잎들이 시들어 버린다. 서리 오기 전에 호박잎과 호박 줄기 끝 새순을 따서 쌈을 싸 먹어야 한다. 무성한 넝쿨 속에 숨은 호박도 찾아 딴다.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네! 이 무슨 일인가! 늦복 터졌네! 호박 두 포기를 심었는데, 많이도 열린다. 부침개 부쳐 먹기 좋은 애호박을 골라 회관에 가져다드렸다. "아니, 김 선생네는 왜 그렇게 호박이 잘 열린 데야." "내년에 우리 집 호박도 좀 심어주지." 좋아한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이 잔디 마당에서 뛰어논다. 아이들에게 크게 허리 숙여 인사 하고 나이를 물었다. 여섯 살, 네 살이다. 어머니 되시는 분이 나더러 후손이세요, 한다. 김용택 후손이냐는 말이다. 내가 본인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일꾼이세요? 하기도 한다. 경기도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어제 새로 나온 그림책을 한 권 줬다.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인터넷에 들어가 시집 리뷰를 찾아 읽었다. 월트 휘트먼의 이런 시 구절을 보았다. '당신의 영혼을 모독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멀리하라'. 날이 어두워진다. 창밖을 보았다. 밥 짓는 아내의 딸그락 소리가 나의 하루를 고른다.
사람 사는 일에 이일 저일 없을 리 없다.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견디며 이겨내고 무슨 수를 찾아 하루하루 살아간다. 사람들의 하루가 다 장하다.
나는 마을의 일상을 잘 따른다. 열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이라고 나라의 일과 무관할 리 없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나라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평일을 평상시처럼 산다.
여든아홉 점순 어머니는 이웃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와서 70여 년을 사신다. 나는 '그 일'이 그렇게 좋다. 오늘은 2024년 10월26일이다.
/김용택 시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