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윤리학 서막 연 임마누엘 칸트
선한 의지,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해
인류 평화 기원한 그의 철학과 달리
무력함 증언하듯 지구촌 곳곳에 전란
그럼에도 '선한 의지' 가치 줄지 않아
"이 세상 어디에서든 아무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다.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하다. 비록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선한 의지만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자신 안에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보석처럼 빛난다. 유익함이나 무익함은 선한 의지의 가치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근대 윤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이 문장은 칸트가 정언명령에 앞서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질인 선한 의지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밝히는 대목이다. 그는 '도덕형이상학 서설'에서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종교적 신앙이나 공동체의 관습 등 기존의 권위가 모두 무너져 가던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덕성이나 경향성에 의존하지 않고 누구나 따르기만 하면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법칙이 무엇일지 고민한 끝에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률을 창안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행위에 앞서 세 가지 단계의 판단을 거친다. 첫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해야하거나 하지말아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기다리고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 물음에 대한 판단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욕망과 능력에 해당하는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직 마지막 물음,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는가, 또는 하지 말아야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판단만이 윤리와 관련이 있다. 이 물음이 마지막에 놓인 까닭은 인간이 행위를 결정할 때 마지막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윤리적인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 행위가 된다. 바로 이 판단을 돕는 것이 선한 의지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듯 선한 의지는 힘이 약하다. 그러므로 선한 의지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칸트가 탄생한 지 꼭 300년이 되는 올 한 해 동안 세계 여러 곳에서 그를 기리는 학술대회가 열렸지만 반향은 크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칸트 대학과 칸트 묘소가 있는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참가를 거부하는 학자들이 많았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칸트는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며 '영구평화론'을 저술했지만 마치 칸트 철학의 무력함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지구촌 곳곳은 전란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그가 선한 의지는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보석처럼 빛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평화를 기원하는 이들의 선한 의지는 언제나 별처럼 빛난다. 선한 의지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지만 선한 의지의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 위태로운 초겨울의 지구 세상에서 나는, 내 안에 무엇이 반짝이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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