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자본 결집·인천부윤 지내

선산 파묘·민간 납골당도 폐쇄

안치 할곳없어 후손 집 임시 거처

한국근대 경제사 의미있는 인물

학계 “市 차원 추모공간 마련을”

개항기 민족자본을 결집한 거상이자 오늘날 인천시장 격인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을 지낸 서상집의 유골함이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후손의 집에 임시 머물고 있다. 2024.11.15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개항기 민족자본을 결집한 거상이자 오늘날 인천시장 격인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을 지낸 역사적 인물 ‘서상집’(1854~1912)이 그의 유해가 안치된 납골당이 갑작스럽게 폐쇄돼 ‘묫자리’를 잃어버린 처지에 놓였다.

갈 곳 없어진 서상집의 유골함은 후손의 집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인천시 차원에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의 자리를 찾아주고, 그 역사적 가치를 되새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상집이 활동하던 개항기 인천(제물포)은 국내외 상인과 은행이 모여 각축전을 벌이던 국제 금융·무역 도시였다. 서상집은 국내 상인들의 우두머리인 ‘객주’(客主) 중 한 명이었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상인 단체 ‘인천항신상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일본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대항하는 중심축으로 활동했다.

서상집은 개항장 일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부호였다. 당시 인천 개항장과 외국인 관련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맡은 인천감리 겸 그 나머지 지역인 인천부를 관장하는 인천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인천뿐 아니라 한국 근대 경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다.

서상집은 1912년 12월16일 숨을 거두고 선산인 경기도 김포 장기리에 그의 부인 김씨와 함께 묻혔다. 직계 후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 직후 비극적 일을 겪거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그동안 서상집의 묘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상집묘는 5년 전 후손이 아닌 쪽에 의해 파묘돼 인근 민간 납골당으로 이장됐고, 이 과정을 서상집 4대손 서모씨가 알게 돼 최근까지 납골당에 안치된 서상집의 유해를 추모·관리해왔다. 서씨는 서상집이 아들이 없는 동생 서상윤에게 양자로 보낸 둘째 아들 서병일의 손녀다.

최근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서상집 유해를 안치한 민간 납골당이 소유권 문제로 폐쇄됐다. 서씨는 지난 추석 성묘 때 그 사실을 알게 됐고, 지난달 초 서상집과 부인 김씨의 유골함을 부랴부랴 수습해 자택으로 모셔와야 했다. 서상집 부부의 유골함은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후손의 집에 머물고 있다.

서씨는 “증조부모 유해는 선산 지역 개발 과정에서 이해당사자 간 소통 부족으로 방치될 뻔했다가 가까스로 민간 납골당으로 모셔 관리해왔다”며 “민간 납골당마저도 갑작스럽게 폐쇄돼 매우 곤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서상집 연구자 등 학계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 경제사와 인천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이자 인천시장의 지위에 있었던 서상집의 유해를 안치할 추모 공간을 인천시 차원에서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인천시가 운영하는 장사시설 ‘인천가족공원’에 마련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서상집은 인천가족공원 운영 규정을 담은 ‘인천시 장사시설에 관한 조례’상 봉안시설 사용자 자격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이 조례 제6조 1항 ‘아’에서 규정한 ‘그 밖에 시장이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를 적용한다면 봉안시설 안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 관계자는 “해당 조례의 제6조 1항 ‘아’ 규정을 적용해 인천시가 관리하고 있는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서상집에 대해 연구한 김창수 인하대학교 초빙교수는 “서상집은 개항기 무역업의 선구자”라며 “그의 생애와 행적을 총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인천시가 인천가족공원 등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인천의 인물’로 기리고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