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집’은 누구인가

 

인천 개항장서 적극적 대항 활동

상인단체 설립·日 화폐 거부 운동

근대상업사 태동기 인물 연구 필요

후손이 보관하고 있었던 서상집 사진. /경인일보DB

외세의 강압적 요구로 1883년 문호를 열게 된 제물포(인천항)는 근대적 상업, 금융, 무역이 발달하는 국제도시로 변모한다. 일본, 중국, 서구 열강의 각축장으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외세가 ‘조계’라는 형식으로 제물포의 토지와 상권 등 자본을 잠식해갔다.

근대 문물과 자본이 물밀듯 밀려든 개항장 인천에서 외세에 대항해 민족자본을 수호하고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친 이들이 ‘객주’다. 객주는 상품 집산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거나 매매를 주선하고, 물류·숙박·금융업까지도 맡았던 중간상인이다.

이들 객주의 모임인 ‘인천객주회’가 1885년 결성됐으나, 조직이나 기능 면에서 근대적 상인 단체의 모습을 갖추진 못했다. 이듬해 인천객주회를 기반으로 최초의 근대적 상인 단체 ‘인천항신상협회’가 출범했다. 제물포 객주 서상집(1854~1912)을 주축으로 서상빈, 박명규 등이 인천항신상협회를 설립했다. 인천항신상협회는 우리 상인들이 외국 상인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제일은행이 인천과 부산 등지에서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 화폐를 유통하자 ‘수취 거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1896년 인천감리서에 투옥돼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백범의 구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강화 출신 김주경과 인천의 객주들이었다.

서상집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 은행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 지배인을 맡기도 했다. 상인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개항장 일대를 관장하는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을 역임했는데,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인천 객주들은 사상적으로 고종을 지지하고 보위하는 ‘근왕파’이거나 ‘친러시아파’였는데,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인천감리를 오래 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영호 인하대학교 교수는 2007년 한국사학회 학술지 ‘사학연구’에 게재한 논문에서 서상집의 활동에 대해 “한국적 매판(買辦)의 가능성을 지닌 동아시아 개항장 자본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직 서상집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연구는 빈칸이 많아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서상집은 어마어마한 토지와 자본을 소유한 대부호였다. 서상집의 장남 서병의(1893~1945)는 당시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세간의 주목을 받던 ‘모던보이’였다고 한다. 고일의 ‘인천석금’(1955년)에서는 서병의에 대해 “전형적인 ‘존불’(John Bull·영국 신사를 뜻함)로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온 모던보이로 알려졌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기록했다. 서병의 가족은 1940년께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톈진에서 일가족이 모두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였다.

서상집의 생애와 활동을 연구해 온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는 “중국과 일본, 유럽의 상업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개항장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서상집의 활동상을 입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선 연구가 더 필요하다”며 “서상집의 활동은 한국 근대 상업사의 태동기에 걸쳐 있으며 그의 행동반경은 인천을 넘어 경강 지역(서울·경기·충청 일대), 중국 상하이와 톈진을 넘나들고 있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