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광기와 전염성 다룬 ‘코뿔소’

현실회피·부정적 태도 군집 키워

문화·가치의 차이 둔 신인종주의

혐오담론의 배타성 자리잡고 있어

공연 유효한 시대, 여전히 잔혹해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코뿔소’(외젠 이오네스코 작, 황이선 연출, 10월31일~11월6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인간이 코뿔소로 변해가는 이야기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이오네스코는 파시즘을 고발하기 위해 코뿔소를 무대에 올렸다. 파시즘의 집단 광기와 그 전염성을 인간 동물이 비인간 동물인 코뿔소로 바뀌는 변신 이야기로 다룬 것이다.

코뿔소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코뿔소가 나타난다. 그 수가 점차 늘어난다. 뵈프, 장, 파피용, 보타르, 뒤다르, 그리고 데이지가 코뿔소로 변해간다. 마침내 모든 인간이 코뿔소로 변한다. 베랑제 혼자 남겨두고. 홀로 남은 베랑제는 불가능해 보이는 말을 남기며 연극이 끝난다. “난 인간으로 남겠어.” 정리하자면, ‘코뿔소’는 “앗! 코뿔소다!”로 시작해서 “난 인간으로 남겠어”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의 이 작품을 연극성이 풍부해 보이도록 하는 장치는 바로 코뿔소이다. 무대에 코뿔소가 웬일인가. 관객은 코뿔소의 등장 그 자체로 낯선 충격을 받게 된다. 더욱이 인간이 코뿔소로 바뀐다지 않는가. 카프카의 ‘변신’처럼 한 명이 아니라 이건 뭐 집단으로 바뀐다지 않는가. 이쯤 되면 제목이 코뿔소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쩌면 베랑제는 주인공이 아니라 목격자에 가깝다.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해 줄 최후의 한 사람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마르틴 니묄러의 ‘침묵의 대가’에는 나치가 그 세력을 확산하는 과정이 잘 담겨 있다. 코뿔소가 그 수를 점점 늘려가는 것처럼, 집단 광기의 전염성이 어떻게 강화되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날 코뿔소는 어디에 있는가. 박물관에 있어야 할 코뿔소가 도처마다 넘쳐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 목록을 작성해보면 어떨까. 오늘날 코뿔소가 거처하고 있는 장소의 목록 말이다.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현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태도가 코뿔소의 군집을 키운다면 오늘날 코뿔소가 거처하는 곳으로는 대표적으로 신인종주의를 꼽을 수 있겠다. 추방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극단적 배타주의로 타자를 혐오하는 방식이 과거와 닮았다. 과거의 인종주의가 피부색 등으로 인종을 구분했다면 신인종주의는 문화적 차이로 구분한다. 인종주의의 하나인 나치즘은 우월한 인종과 저열한 인종으로 인종을 나누어 저열하다고 낙인찍은 인종을 차별, 배제, 축출, 박멸에 이르게 하였다. 반면 신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차이의 자리에 문화나 가치의 차이를 두고 있다. 제주에 예맨 난민이 도착했을 때 국민청원을 올린다거나, 이슬람사원 건축 반대를 위해 삼겹살을 구워 연기를 피우는 퍼포먼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인종주의와 신인종주의는 서로 다른 현상으로 보이지만 그 본질에는 혐오 담론의 배타성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코뿔소가 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환경의 날에 한 연설은 코뿔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공룡을 멸종시킨 운석처럼 인류는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기후 문제의 경우, 우리는 공룡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 운석이죠.” 기후 위기 앞에서는 인간이 코뿔소다. 인간이 인간에게 코뿔소다. 또한 멸종한 생명에게, 멸종이 임박한 생명에게 인간이 코뿔소다. 그리고 또한 자연에게 인간이 코뿔소다.

어느 날 갑자기 코뿔소가 난입해서 우리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코뿔소는 바깥에서 난입하지 않았다. 코뿔소는 먼 곳에서부터 오지 않았다. ‘코뿔소’의 공연이 유효한 시대는 여전히 잔혹한 시대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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