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미국서 영문·신문학 공부
美 군정청 통역관하다 포항으로 떠나
출세·성공 버리고 평화로운 삶 선택
산문시처럼 시적인 구성을 가졌던
그의 수필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
아침 일찍 포항으로 가는 KTX에 올랐다. 오랜만이었다. 경북매일신문이 버티고 있고, 포항 사람 이대환 작가가 오래 살아온 곳이었다.
바로 며칠 전 포스코 공장에 불이 났다고 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그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포항 아니라 이 나라에서 포항의 그 공장은 무시될 수 없다.
이번의 포항행은 한흑구라는 문학인 때문이었다. 그의 수필세계에 대해 말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목은 ‘한흑구 수필의 형식성과 예술미’. 한흑구라고 하면 이름이 참 낯설지만, 수필 ‘보리’와 ‘나무’를 쓴 사람이라 하면 고개 끄덕일 수도 있다.
포항에서 이 분을 기념하는 사업을 한다고, 처음 나를 부른 것은 몇 년 전이었다. 한흑구를 몰라서 부끄러웠다기보다, 공부라는 것은 역시 한도 끝도 없는 것이었다. 이 한흑구는 어떤 사람인가?
일제 강점기에 태평양 건너 미국에 유학한 문학인은 손꼽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한흑구, 본명 한세광인 이 사나이는 장장 5년을 미 대륙에서 보냈다. 시카고 노스파크 대학,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캘리포니아 USC 등에서 5년간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한 것이었다.
어째서 졸업하지 못했던 것일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 분명히 말했다. 그는 졸업장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시간을 들여 미국을, 미대륙을 넓게 공부하고 경험하려 했다.
그가 남긴 소설 중에 ‘황혼의 비가’라는 게 있다. 미국 남부, 노예제도와 흑인차별이 짙게 남아 있는 세계를 직접 경험하고 쓴 작품이었다. 그는 옛날 월트 휘트먼이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을 걸어서 답파하듯 방랑자의 심정으로 드넓은 세계를 자신의 가슴 속에 품고 싶어했다.
한흑구 45주기를 기념하는 추도식이 열린 곳은 포은문학관.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문학관이었다.
나는 한흑구 수필이 어째서 그렇게 감명 깊을 수 있었는가를 말했다. 그는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쓴다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갔다. 형식에 갇히지 않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수필도 구성을, 주제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의 이상에서 수필은 바로 산문시처럼 시적인 구성을 가진 것이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수필 ‘보리’와 ‘나무’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행사 시간 내내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실은, 한흑구의 수필보다는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평양 태생이었던 그는 해방 이후 북한 땅에서 버텨낼 수 없었다. 일찍 시대의 흐름을 갈파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미 군정청의 통역관이 되었다. 호주머니 빈 문학인들의 술자리를 책임졌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홀연히 동해 바닷가의 한적한 소도시 포항으로 떠나가 버렸다. 출세와 성공의 길을 버리고 바닷가의 평화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해방공간이라면, 채만식 소설 ‘미스터 방’에 나오듯이 어떻게든 미군에 손을 대고 싶어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를 살면서 한흑구는 어떻게 명리를 버린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세속을 떠난 그를 다시 불러내 포항 사람들과 시장님이 기념행사도 만들고 문학관도 짓는 것은 이 무슨 인생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추념 행사가 끝나고 나의 발표도 끝나고, 나는 이대환 선배를 따라 가까운 구룡포에서 그곳 분들과 함께 밤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구룡포는 언제까지만 해도 포항보다도 컸다는 포구였다. 한밤의 포구에 닿아 아침이면 항구가 눈 아래 보인다는 언덕 위에 오르자 세상은 더 없이 고요했다.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한흑구가 염원한 것이 바로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었던 것도 같았다. 그런 삶의 경지를 개척한 이라면 오늘에 다시 불러내는 뜻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