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미국 배경으로 한 가상의 마을
의사와 신문 편집장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
흔한 갈등 요소·극적 장면 이끄는 장치 보다
꾸밈없는 담백함으로 하루하루 그려 매력적

“살면서 자신의 삶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까. 매 순간?” 우리읍내 중
1900년대 초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 주의 그로버즈 코너즈라는 가상의 마을. 손턴 와일더의 희곡 ‘우리읍내’는 이곳에 살고 있는 의사 깁스 선생과 신문 편집장 웹의 가족을 중심으로 깁스의 아들 조지와 웹의 딸 에밀리의 성장과 사랑, 결혼과 죽음을 다룬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갈등의 요소, 극적 장면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들을 이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꾸밈없는 담백함으로 우리읍내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잔잔한 물결처럼 그려내고 있는 극의 매력은 이러한 점에서 엿볼 수 있다.

과하지 않은 조명·마임으로 표현한 소품 자리
허공 가르는 배우들의 동작이 상상력을 자극
김광보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이 연출한 이번 연극 역시 무언가 많이 덜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우선 무대가 그랬다. 관객이 마주한 무대에는 과하지 않은 조명과 배경, 책상과 의자, 사다리, 문틀 정도가 보인다. 여느 연극이었다면 소품을 썼을 것 같은 장면에서도 대부분이 마임으로 표현된다. 허공을 가르는 배우들의 동작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했다. 무엇이든 떠올리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에는 역시 하얀 스케치북이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간결해진 동선들로 인물 그 자체와 그들의 서사에 좀 더 집중하게 됐다.
극을 보는 내내 좋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결국 평범함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어딘가 슴슴한 듯 하면서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우리의 일상은 극이 만들어졌던 80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큰 창문을 앞에 두고 공부를 하는 두 아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아이들을 깨우는 엄마, 달빛을 가로등 삼아 산책하는 부부, 결혼식 전에 볼 수 있을 법한 부산스러운 풍경들까지. 우리읍내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란 (때때로 벌어지는 작은 이벤트 같은 사건들을 포함해) 그것이 공감이든 놀라움이나 황당함이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일까.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3막은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일상의 요소와 요소들이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 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둘째 아이를 낳다 죽음을 맞은 에밀리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무대 양쪽으로 나눠 앉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죽은 사람들이 앉은 비어있던 한 자리는 에밀리의 것이 되었다.
다른 죽은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밀리는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보길 원했다. 다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지극히 평범해서 더 행복하게 느껴졌던 하루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 없기에 부모님을 향해 좀 더 바라보고 있자 소리치는 에밀리의 모습에 절로 마음이 아파온다. 그 고통은 끝내 에밀리를 죽음의 길로 뚜벅뚜벅 걷게 했다.

극의 말미에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이 서로의 의자를 바꿔 앉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 있다.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장면 중 하나이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고, 또 다시 태어나는 어떤 고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살아온 지난 시간들과의 작별을 고하는 일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살아야 하는 것과도 같고, 잘 산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잘 보내야 하는 것과 같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스친다.
무대의 불이 꺼지는 그 순간, 배우들이 모두 앉고 남은 한 자리에 조명이 비춘다. 이 순간을 함께 공유했을 관객들을 위한 자리일 것이다. 극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산다는 것은 어둠을 걸어가는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깨닫기에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이기에 의자 위로 떨어진 빛이 어쩐지 깊고 아득하다. 경기도극단 연극 ‘우리읍내’는 11월 24일까지.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