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배달된 아담한 배추 20포기

양념에서 구수하고 맑은 기운 올라와

올해 김치 맛있을 것 같은 기대감

푸닥거리 하고 났더니 허리·등 쑤셔

추위에도 묵묵히 김장하던 母 떠올라

김예옥 출판인
김예옥 출판인

느닷없이 배추가 배달되었다. 나한테 묻지도 않고 무더기로 배추를 보낸 곤지암 농부에게 봉변을 당한 느낌이었다. 한창 일이 바쁠 때여서 당장 김장을 할 수도 없었고, 더구나 날이 너무 푹해서 김장할 맛도 안날 뿐더러 한다해도 바로 김치가 익어버릴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바쁜 일 끝내느라 박스도 열지 않고 놔두었다. 일주일 지나 개봉하니 누렇게 뜬 잎도 있었지만 걱정하던 만큼은 아니었다. 두 쪽을 내면 될 아담한 배추 20포기가 들어있었다.

이제 마음이 바빠졌다. 다행히 기온도 많이 떨어졌다. 하늘이 김장을 하라고 허락하는 걸까? 주말농장에 가서 무와 쪽파, 갓을 뽑아왔다. 여름이 너무 더웠던 터라 소출이 별로 없다. 배추모종을 심었지만 두 포기만 살아남았다. 배추는 벌레 때문에 농약과 비료를 듬뿍 줘야 하는 작물이다. 소꿉장난하듯 밭을 깨작이고 있는 나로서는 농약에 비료까지 칠 일은 아니다 싶어 몇 년 전부터 배추는 접었다. 반면 무는 잘 자라는데 올해는 씨 뿌릴 때 너무 더워 발아가 되지 않았다. 세 번째 뿌려 겨우 싹이 나왔는데 이제는 시기가 지나버렸다. 그나마 앞서 모종을 사다 심은 몇 개가 무럭무럭 자라 밑동이 잘 들었다. 이 정도면 김장거리로 충분하다! 쪽파도 나름대로 잘 자랐고 양도 충분하다. 갓은 겨우 양을 맞출 정도다.

배추를 다듬어 반쪽으로 가르고, 소금물을 풀어 큰 대야 두 곳에 절였다. 중간에 한 번 뒤적여 밤새 놔두면 충분히 절여질 것이다. 따뜻한 아파트 실내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니 시골집에서 어머니가 김장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살을 에는 추위에 안마당 수돗가에서 백 포기 넘는 배추를 부려놓고 구부정한 허리로 절이고 뒤적이고 씻고 하던…. 우리가 내려오기를 내심 기다리셨을 텐데, 막상 가도 큰 내색 없이 묵묵히 추위에 힘을 들이던 모습이.

농수산물시장에 나갔다. 김장하기엔 이른 때인지 손님이 별로 없다. 여름 더위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생새우값을 물었더니 2만5천원에서 2만7천원(400g)이란다. 불에 덴 것처럼 반응했더니 “더위 때문에 새우가 없대요” 한다. 지난해엔 1만원대였다. ‘기후위기인데 우리가 대가를 지불해야지’하는 맘으로 생새우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자잘한 갈치도 샀다. 잘게 썰어 김치에 넣으면 맛있다고 하니 한번 시도해보련다. 새우젓과 황석어젓을 사고 굴도 샀다. 육수용으로 멸치, 황태머리, 디포리도 구입하고, 김장과 무관한 생선도 사면서 거기에 살짝 ‘감태’도 끼워넣었다. 고급식품이라는 말에.

먼저 찹쌀로 밥을 지었다. 거기에 멸치액젓을 부어 밥이 삭도록 놔뒀다. 그리고 황태머리를 2시간 가량 푹 끓여 육수를 내고 이어 멸치와 디포리를 별도로 끓였다. 황석어젓도 끓여서 체에 받쳐두었다. 갈치를 잘게 써는데도 기운이 필요했다. 무는 식감을 위해 좀 굵게 채썰고, 쪽파는 많이, 갓은 적당히, 대파는 조금 썰었다. 생강도 양파도 마늘도 이미 다져놓았다.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12시간 동안 배추는 적당하게 절여졌다. 물기를 잘 빼는 게 관건이다. 양념도 덜 들어가는 데다 속도 넣기 쉽기 때문이다. 매년 물기가 남아있어 절인 배추가 다 살아 일어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커다란 대야에 양념을 버무린다. 미리 고춧가루를 뿌려 붉게 물들여놓은 무채 위에 준비해둔 갖은 양념들을 넣고 고춧가루를 푸짐하게 쏟은 다음 꿀을 둥글게 둥글게 뿌려주었다. 이제 활활 젓는 일만 남았다. 십수 번 맨손으로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양념을 골고루 섞는다.

손으로 찍어 맛을 본다. 약간 싱겁다. 새우젓과 멸치액젓을 더 넣어 뒤적인 다음 다시 양념을 먹어보았다. 굿이다! 올해는 왠지 김치가 맛있을 것 같다. 양념에서 구수하고 맑은 기운이 올라온다. 양념이 무겁고 진하다 싶으면 내 마음마저 개운하지 않은데 이번엔 뭔가 기대를 걸게 한다.

김장을 한다고 푸닥거리를 하고 났더니 허리, 등, 팔다리가 다 쑤셨다. 그러나, 그러나 한겨울 물가에서 그 산처럼 부려진 배추를 감당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내 나를 잡아주었다.

/김예옥 출판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