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도성 안 왕후 정릉 만들어
태조 사후, 이방원의 복수로 이장
정릉에 얽힌 이야기 정동에 남아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공간으로
궁담길 걸으며 시간여행 해보자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며칠 전 tvN에 낯익은 얼굴이 비친다. 음악도 흐른다. 별이 빛나는 밤 기억 속에, 가슴 속에 담아온 이문세 노래다. 은행나무 노란 잎이 나부끼면 문득 언덕 밑 예배당 ‘정동제일교회’도 생각난다. 그곳에 가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왠지 따뜻한 차 한잔도 함께 마시면 좋겠다. 옷깃을 세우며 경운궁 궁담길 따라 걷는다. 정동길 왜 정동(貞洞)이라고 했을까?
600여 년 전 이성계는 사랑꾼이었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태조 이성계는 왕비 조언도 들었다. 조선 최초의 왕후이자, 조선 최초 세자 방석의 어머니가 신덕왕후 강(康)씨다. 왕과 왕비의 꿈과 사랑이 경복궁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양도성이 완공된 후 신덕왕후가 병든다. 기쁨과 슬픔이 밀려드는 시간, 도성 안 경복궁에서 맞이한 최초의 왕비가 궁 안에서 죽는다. 신덕왕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능을 만든다.
도성 안 능을 쓸 수 없지만 사랑꾼 이성계는 눈앞에 두고자 했다. 경복궁 앞 육조거리 지나 언덕배기 황토현에 왕릉을 만든다. 조선 최초 왕릉으로 보다 가깝게, 더욱 크게 그리고 많은 석물로 만든다. 또한 최초 능침 사찰인 흥천사도 능 옆에 최대 규모로 조성한다. 도성 안 유교의 나라에 가장 큰 사찰이 만들어진다. 신덕왕후 능이 정릉이다. 정릉과 흥천사(興天寺)는 언덕이 있는 영국대사관 터와 대한성공회 그리고 조선일보 미술관과 서울시의회 지나 덕수초등학교까지 3만3천여 ㎡로 추정된다.
태조는 경복궁에서 정릉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흥천사 동종 소리에 맞추어 잠을 잤다. 사랑하는 아내와 애틋한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 마음은 어떠했을까. 태상왕이 된 태조는 아들 이방원에게 죽으면 도성 안 정릉에 함께 묻어 주길 원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태조 사후 능을 도성 밖 양주에 조성하였다. 아버지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들은 함흥 흙과 억새를 가져다 왕릉에 덮어 억새 봉분으로 위안을 삼았다. 도성 밖 동구릉 시작이 건원릉이자 조선왕릉 중 유일한 봉분이 억새로 되었다.
태종의 복수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성 안 정릉을 파헤쳐 도성 밖 사을한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봉분도 없앴다. 또한 최초 왕비는 후궁으로 격하되어 종묘에 신주까지 없앴다. 하륜의 충언이었다. 슬픈 이야기는 정릉에 쌓였다. 정릉 석물을 광통교 건축에 썼다. 정릉 부재로 사용된 신장석과 구름 모양이 새겨진 무덤 돌, 부처 모양 돌이 아예 거꾸로 세워졌다. 청계천에서 가장 오래된 광통교가 정릉 석물이다. 모든 사람이 밟기를 원했다. 흥천사도 뜯겨져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만들었다.
도성 안 정릉과 흥천사는 도성 밖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으나 정릉에 얽힌 이야기는 정동에 남았다. 정동은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공간이다. 120여 년 전 경운궁 궁담길에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중명전부터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사이 정동제일교회까지 젊은 청춘과 남녀 학생들에게 정동은 꿈을 주었던 거리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정동, 구세군 종소리 따라 궁담길 걸으며 시간여행을 해 보자. 당신의 꿈을 찾아서….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