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적대적 갈등관계 치달으며
어느 때보다 전쟁 가까워짐을 느껴
상황 악화시키고 있는 정부의 언행
언제 무력충돌로 이어질까 심히 걱정
세계인권선언 때와 무엇이 달라졌나
닭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닭을 멀리하게 된 건 초등학생 무렵이었다. 그 당시 나는 강화도에 살고 있었다. 북한과 인접한 동네에 사는 초등학생 어린이에게 6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반공 의식 고취를 위해 표어와 포스터를 만들고 전쟁 관련 각종 숙제와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반공영화였다. 이승복 어린이의 집을 쳐들어온 무장공비 이야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이라이트 장면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살육과 참극이 펼쳐진다. 아직도 생생하다. 배고픔에 못이긴 무장공비가 집 마당을 뛰어놀던 닭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던 그 장면이. 초등학생 어린이가 지켜보기에 반공영화는 공포영화와 다름없었다. 영화를 본 이후 몇 날 며칠 잠을 못 이뤘다. 대북 방송이 더욱 생생하게 귀를 울리고,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반공영화가 노리는 학습효과가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나에게 남겨진 학습효과는 확실했지만 대신 닭을 멀리하게 되는 부작용을 얻었다. 닭을 보면 전쟁이 남긴 비극과 상처, 잔인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요즘 어렸을 적 느낀 전쟁의 불안이 자주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전쟁이 가까워져 왔음을 느낀다. 남과 북의 관계는 끊긴 철길, 도로처럼 단절되고 적대적 갈등 관계로 치닫고 있다. 북에서 오물 풍선을 살포했다는 안전 안내 문자는 위기가 일상화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대북 전단을 보내고 오물 풍선이 날아오고 서로 주고받듯 증오가 휴전선을 넘나든다. 러시아 북한군 파병 문제는 그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정부는 북한군 파병에 맞서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 지원을 검토하겠다 한다. 죽고 죽이는 것이 목적인 전쟁터 파병에 대한 우려와 반대가 아닌 살상을 위해 무기를 지원하겠다니! 정부의 언행이 남북, 국제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연일 최악으로 치닫는 대결 구도. 이런 긴장이 언제 어떤 방식의 무력 충돌로 이어질까 심히 걱정된다. 전쟁의 기운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총성과 포탄이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땅을 흔들고 있다. 누군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공포와 두려움에 갇혀 있을지도 모를,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을지도 모를 이 순간. 핵전쟁, 3차대전 위협까지, 전쟁은 이미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전쟁, 인간성 말살로 치닫던 극단의 시대는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다. 1·2차 세계대전, 대량 학살과 전쟁 범죄는 인류 역사상 참혹한 인권 침해로 기억되고 있다. 나치의 만행과 홀로코스트,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했던 전쟁이라는 폐허. 인류는 그 처참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시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도록 1948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을 만들게 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은 전쟁으로 인한 인권 침해를 반성하며 보편적인 인권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권은 모든 평화와 정의의 기초이며 30조에 이르는 조문에는 존엄하고 평등한 삶, 자유를 보장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세계인권선언을 만든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는가.
‘인류는 미쳤다. 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들을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인류는 미쳤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사망하기 하루전 쓴 일기다. 그의 기록은 여기에서 멈췄지만, 전쟁의 참상을 외치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만행으로 사라져가는 목숨이 있다. 폐허 속에 살아가는 삶이 있다. 곧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12월10일이 다가온다.
76년 전 인류의 다짐은, 아직도 현재에 도래하지 못했다. 인권을 위한 날임에도 마음껏 기념할 수 없는 이유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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