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굴곡진 근현대사 공유
조세이 탄광 수몰참사 추적 보도
양심적인 日 시민의 힘 확인 계기
성급했던 사도광산 추도식 파행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지혜 필요
지난달 홋카이도 전역을 훑다시피 하고 돌아왔다. 11월 홋카이도는 비수기에다 어정쩡한 달이다. 라벤더가 아름다운 여름도, 그렇다고 설경을 감상하는 겨울도 아닌 까닭이다. 그럼에도 서둘러 다녀온 건 내년 1월을 목표로 책을 내기위해서였다. 내년은 광복 80주년, 한일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2025년은 한일관계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뜻깊은 해다. 머무는 일주일동안 홋카이도 전역에 산재된 강제 동원 현장을 찾아다녔다. 편안한 여행지로 여겼던 홋카이도에서 수탈과 착취를 확인하는 건 아이러니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땅에서 인권유린과 노동력 착취가 있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본은 우리와 굴곡진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 불편하고 불쾌한 기억이다. 일제는 일방적으로 조선을 침탈한데 이어 강압적으로 독립 의지를 꺾었다. 우리말과 문화를 말살한 것도 모자라 강제 징용, 위안부 동원까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우익 정치인들은 습관처럼 과거사를 부정한다. 한일관계가 작은 충격으로도 쉽게 깨지는 유리그릇과 같은 근본원인은 여기에 있다. 가해자가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으니 피해자 입장에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홋카이도에서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던 중 두 가지 이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조세이 해저 탄광과 관련 일본 시민단체 활동, 다른 하나는 사도탄광 추도식 파행이다. 야마구치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 탄광에서는 1941년 2월 광부 183명이 수몰됐는데 이 가운데 136명은 조선인 희생자다. 일본 정부는 갱도 입구나 유골 위치를 알 수 없다며 갱도 발굴에 미온적이다. 하나 일본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모임은 30년 동안 조세이 탄광 역사와 수몰 참사 진실을 추적해왔다. 이 단체는 수몰 참사 희생자 183명의 신분을 모두 확인하고 추모비도 세웠다. 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발굴 조사비 120만엔(약 1억1천만원)을 조달했다. 시민단체는 내년 1월 유골 발굴에 나설 예정인데 성공하면 진상 규명과 발굴 작업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조세이 탄광 보도는 양심적인 일본 시민의 힘을 확인하는 기사였다.
반면 사도광산 추도식 파행에서는 감정부터 앞세우는 우리의 반복되는 조급함을 확인했다. 사도광산 추도식이 파행된 1차적 책임은 강제동원 표현을 건너뛰고 사과나 반성을 외면한 일본 정부에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성급한 대응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추도식에 참석한 일본 외무성 정무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전력을 문제 삼아 추도식 참석을 보이콧했다. 그러나 일본 교도통신 보도가 오보로 밝혀지면서 모양만 우습게 됐다. 한일관계에서 우리 정부 대응은 매사가 이런 형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정상회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 장소로 결정된 가고시마 이부스키가 정한론 발상지라는 이유로 뒤늦게 장소 변경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희망하는 곳을 말하면 변경해주겠다며 물러섰다. 회담은 애초대로 이부스키에서 진행돼 우리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모양이 됐다. 일왕 표현이나 욱일기 자위대 함대 입항 논란도 연장선상에 있다.
박훈 교수는 ‘위험한 일본책’에서 ‘중국은 20세기에 일본과 14년간에 걸쳐 전쟁을 벌였고 일본군에 의해 수백만 명이 희생된 나라다. 그러나 그들은 천황을 굳이 일왕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욱일기를 매단 자위대 함대 입항을 취소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신친일파거나 토착왜구라서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일본을 앞서는 날이 와도 우리는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냉정함을 당부했다.
정말 일본을 이기고 싶다면(사실 이긴다는 표현도 이제는 식상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청년세대는 이제 일본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즐긴다. 지난 2년 동안 일본 전역을 누비며 느낀 것 또한 이런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부정)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한다고 했는데, 이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임병식 국립군산대학교 교수·前 국회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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