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닷새 후 찾아온 기록적 첫눈
왠지 슬프게 느껴지는 겨울 노래
연탄재처럼 흐트러진 경제 위기
불안한 미래는 가슴 속 숯덩이로
현실 이겨낼 때 진정한 봄날 온다
어쩌면 눈은 낙엽을 덮으려 내리는지도 모른다.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은 책갈피로 끼워두지만, 천지에 나뒹구는 거무죽죽한 낙엽은 어찌하란 말이냐. 붉게 물들어 보지도 못하고 시든 잎들 말이다. 한때 신록을 뽐냈던 잎새들인데. 이효석은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엽은 끝이 아닌 여전히 계속되는 삶의 과정이라고 설파했다. 그래서 낙엽을 태우며 즐기는 삶을 가장 의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낙엽은 회한의 잿빛 가슴 같다. 청명한 하루는 붉은 노을로, 활기찬 한 해는 단풍으로 마감하는데.
그래서 첫눈을 고대했을까. 지구온난화라고 해도 절기(節氣)는 때맞춰 찾아오니까. 서울에 첫눈이 내린 11월27일은 바로 소설(小雪) 닷새 후이다. 이날 서울 최심 적설은 16.5㎝. 11월 눈으로는 117년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대설(大雪)이 12월7일이니 계절의 변화가 무섭도록 정확한 셈이다. 물론 고개를 갸웃거린 이들도 있을 게다. 같은 서울이라도 강북구는 20.4㎝가 쌓였는데, 강남구는 4.1㎝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강북에는 시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구절처럼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 정경일까. 그렇다고 북적이는 강남이 김광균의 ‘설야(雪夜)’ 구절처럼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는 아니겠고.
그래도 눈이 쌓이면 아름답고 행복할 듯한데 묘하게도 백설과 겨울을 읊는 노래들은 왠지 슬프다. 샹송가수 살바토레 아다모가 부른 ‘눈이 내리네’는 ‘눈이 내리네. 오늘 밤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눈이 내리네. 내 마음은 검은 옷을 입고’로 시작한다. 그리곤 ‘이 지독한 침묵, 새하얀 고독. 당신은 오늘밤 돌아오지 않고, 절망을 부르짖는다. 그래도 눈이 내리네. 어떻게 할 수도 없이’를 되뇐다.
가수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도 가슴을 엔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의 선율을 빌어왔는데, 모두가 떠나버린 황량함이랄까. ‘날 사랑했나요. 그것 만이라도 내게 말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며 하얗게 부서진 마음을 노래한다. 단가 ‘사철가’ 역시 겨울은 서럽다. 이 산 저 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 녹음방초가 꽃을 능가하는 여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의 가을이다. 헌데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찬바람 부는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銀世界)가 되고 보면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라는 거다.
그런데 무정한 세월을 노래하는 이 사철가에 가장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가는 세월 어쩔 수 없겠지만,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할 사람들을 콕 찍어 말한다. 불효자에 앞서 ‘국곡투식(國穀偸食)하는 놈’이다. 나라 곡식을 훔쳐 먹는 이들을 잡아들여 저 멀리 보내 버리자는 거다. 요즘으로 보면 나랏일을 한다면서 국민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고,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면서 권력자를 비호하고, 정의를 구현한다면서 유전무죄 유권무죄 유검무죄를 조장하면서 뻔뻔히 국민 세금을 축내는 자들이겠다. 심부름꾼 권력이면서 마치 주인인 듯 행세하는 본말전도(本末轉倒) 속물들 말이다.
경제난과 외교안보 위기가 흐트러진 연탄재처럼 널려 있는 겨울이다. 반 지하에는 여전히 생활고가 노출돼 있다. 불안한 미래는 가슴 속 숯덩이이다. 그 위로 눈이 쌓인다고 해서 덮여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시인 퍼시 비시 셀리는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고 읊었다. 여기서 겨울과 봄은 자연적인 계절의 순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따뜻한 아랫목에 웅크리고 있으면 미구에 봄이 찾아온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혹독한 겨울, 오늘의 현실을 온몸으로 맞서 이겨낼 때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함의이겠다. 모진 북서풍은 나뭇잎을 떨구고 한파를 몰아치지만 이를 이겨내야 초록과 희망의 제피로스, 즉 봄날의 서풍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거다.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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