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사회 기회 균등해졌대도
문제 제기시 ‘드센 여자’ 꼬리표 등
여전히 성차별 관련 지수서 ‘맨 뒤’
이런 시류에 얽힌 동덕여대 사태는
마녀사냥에 안전한 공간으로서 필요
여중을 졸업하고 남녀공학에 입학했지만 반이 구분되어 있어 여고와 다름이 없었다. 대학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다녔으나 남학생이 거의 없어 그동안은 성차별을 겪을 틈이 없었다. 이것이 성에 대한 차별이겠구나 싶었던 건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후였다. 학과에 발생한 문제에 접근하는 대학의 남성 보직자 교수나 남성 교직원의 태도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딸을, 혹은 권위적인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었다. 일방적으로 훈계하거나, 대화를 나눌라치면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교육하고 연구하는 동료 교수연구자라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였다. 무례를 참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면 드센 여자라거나 조직 부적격자란 꼬리표가 붙었다. 여성교수회를 조직하고자 했으나 여성만의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오히려 역차별이란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각자 겪었던 어려움을 얘기하다보면 우리는 손쉽게 취급받곤 했고 그게 다름 아닌 성에 대한 차별이었겠구나 구체적 사례 안에서는 명확히 인식됐다.
연애나 성에 대한 남녀 사이의 이슈가 발생할 때 여성만의 문제로 해석하거나 남성의 문제를 경감시키는 주변의 반응에 놀라기도 했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던 건 말을 보태는 순간 예민하다거나 까탈스럽다거나 함께 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란 평가가 따라올 걸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말을 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란 그동안의 학습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의하는 척 하거나 침묵하면서야 비로소 “따지기 좋아하는 여자”란 부정적 타이틀을 뗄 수 있었다.
성에 대한 사회의 기회는 상대적으로 균등해졌다지만, 일상 속에는 여전히 수용할 수 있는 여성과 수용할 수 없는 여성에 대한 굳건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역차별’이란 단어는 이러한 개념과 경험이 불일치하는 기득권으로부터 나온다. 개념상으론 성에 대한 차별이 없는데 경험상으론 여전히 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기에 차별하는 집단과 차별받는 집단 사이에 온도차가 생긴다. 개념은 있되 경험이 없는 집단에게는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장치가 모두 역차별이 되는 셈이다.
여성임금근로자는 2024년 전체 임금근로자 중 46.1%를 차지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여성 자영업자의 비중도 전체의 30%를 넘어섰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크게 증가하고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신장되며 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2024년 성차별 조직문화지수에서 직장의 주요직책, 노동조건, 채용, 승진 지표는 모두 F등급을 받았고(직장갑질119, 아름다운재단), 남녀 임금 격차나 유리천장지수 또한 여전히 OECD 1위다.
성별 격차가 사회적 지원으로 보완되고 시정돼야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 담론 속에서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차별을 ‘능력’의 당연한 결과로 보는 관점은 급기야 여성가족부 폐지로 이어졌고 이러한 사건은 역차별 논란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여가부 폐지는 선거전략으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약자를 보호해 통합을 이루어야 할 사회의 책임은 방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동덕여대 사태는 이러한 시류 속에서 읽힌다.
동덕여대는 남녀공학전환을 반대하며 시위를 한 학생 21명을 고소했다. 이로써 여자대학의 존재근거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54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복구비용이나 젠더갈등, 고소고발이란 이슈만 부유하게 됐다. 이 대학 출신은 거르겠다는 정치인 시아버지와 기업 남성 임원도 등장했다. 문제를 제기한 여성으로 나에게 씌었던 개인적 프레임을 사회는 그대로 일군의 여성집단에게 덧씌웠다. 이것이 수많은 여성들이 동덕여대 남녀공학전환반대 시위에 연대하게 되는 개인적이면서 정치적 이유다. 개념과 경험이 불일치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겪는 부당이나 불편을 당연시하거나 체념하지 않기 위해, 체념할지라도 저항의 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로부터 나온 질문과 문제의식을 또 다른 차원으로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당하지 않는 안전한 공간으로서의 여대는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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