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포고령 말미 ‘처단’ 묻는 딸아이
2024년에 ‘사어’ 가르치는 현실 기함
따스한 거실과 대비되는 TV속 장면
상황 끝나도 내면 꿈틀거림 계속돼
출간 앞두고 광장에 또 나가야 할까
러시아 크라스키노의 작은 마을에 가면, 아니 작은 마을이라고 해야하나 황량한 벌판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곳엘 가면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가 있다. 손가락을 끊어 독립을 향한 의지를 다졌던 단지동맹을 기리는 비석이다. 의아하다. 왜 한국에 있지 않고 그곳에 있나. 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늦가을에 그곳에 다녀왔다. 단지동맹비 옆에는 아주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있고, 그 오두막에 사는 이가 단지동맹비를 종종 청소한다고 했다. 나는 오두막 옆 낡은 벤치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러시아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를 한국으로 옮겨오지 않는 건 이상했다. 하긴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치욕과 수모를 겪었다. 조금만 공부해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끝내 고개를 저으며 모른 척하려는 사람들때문에 그의 영혼은 죽어서도 씁쓸했을 것이다. 정말 이상한 세상에 내가 살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기어이 이틀 전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엄마, 처단이 뭐야?” 뉴스에 나오는 포고령을 보고 열 살 딸아이가 물었다. 포고령 말미에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14조에 의하여 처단한다’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처단. 나는 기함했다. 내가 아는 처단이란 1950년대 한국전쟁이라든가 보도연맹이라든가 여순사건이라든가, 뭐 그럴 때나 들어본 단어일 뿐이었다. 거의 사어(死語)가 아니었나. 역사 공부를 하라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2024년 겨울밤에 아이에게 처단이라는 단어의 뜻을 가르쳐야 하다니.
같이 자자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오늘 거실에서 뉴스를 좀 봐야할 것 같아. 넌 네 방에서 혼자 잘래?” 아이는 도리질했다. 달랠 정신도 없어 거실 바닥 온도를 높이고 이불을 깔아주었다. 오랜만에 거실에서 자는 잠이 재미나 아이는 천장 등을 끄고 대신 여기저기 놓인 스탠드를 켰다. 주홍빛 능소화 같은 조명이 켜진 거실은 한껏 따스하고 예뻤다. 뉴스 속 군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진입하던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하도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엄마, 나 그럼 내일 학교 못 가? 위험한 거야?” 묻는 딸에게 그냥 웃어 보이기만 했다. “전쟁은 안 나지?” 아이는 다시 물었고, 나는 “그런 일은 없어. 전쟁 같은 건 안 나” 대답했다. 엄마가 전쟁은 나지 않을 거라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조금 무서웠기 때문에 코끝까지 이불을 당겨 덮었다. 나도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앉았다. 바닥에서 온기가 올라왔지만 어깨가 추웠다. 당연히 창문은 열린 곳 없었다. 새삼 웃풍이 들이칠 리도 없었으니 그건 그냥 계엄 아래 공기가 내뿜는 차가운 한숨 같은 것이었다.
155분만에 비상계엄은 종료되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화난 표정이 뉴스 속을 떠다녔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해서 내 속의 꿈틀거림까지 종료된 건 아니었다. 곧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발표할 테니 인제 그만 아이 곁에 누워도 될 일이었으나 도통 그럴 수가 없었다. 티브이 속 장면들은 여전히 영화 속 장면 같기만 했고, 나만큼이나 기함한 친구들이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상계엄 포고령 3항은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였다. 나는 이번달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내 책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탈탈 털어보아야 별것 없겠으나 ‘통제’라는 단어는 역겹다. 나는 지난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이 우스워서 나를 포함한 블랙리스트 속 작가들은 껄껄 웃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했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는 작가도 있었다. “이 판국에 입 다물고 있었다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잖아!” 우리는 그렇게 말하며 광화문 광장에 나갔더랬다. 광장에 나가지 않으면 대통령이 모를까봐, 일일이 말해주어야만 알아들을까 봐 우리는 이 추운 날 또 광장에 나가야 할 것이다. 출간을 앞두고 있어 진짜 바쁜데. 뉴스를 좀 더 보려 했지만 아이의 아침을 챙겨줄 일이 걱정되어 스탠드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따뜻하니 아이는 온통 이불을 걷어차는 중이었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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