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미 소설가
김중미 소설가

오는 25일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 2주기가 다가옵니다. 1978년 첫 출간된 ‘난쏘공’은 끊임없이 읽히며 올해 2월 150만부를 돌파하는 역사를 썼습니다. 왜 여전히 ‘난쏘공’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난쏘공’의 주요 배경이 된 인천에서 가칭 ‘소설가 조세희 선생을 추모하는 인천사람들’이란 시민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세희 작가 2주기를 맞아 소설 속 장소 답사, 전시, 추모의 밤 등 여러 추모 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경인일보에 매주 1편씩 3차례에 걸친 추모 기고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11월 23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영희와 영수가 다니던 노동자 교회,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일꾼교회)에 공부방 식구들과 지역 청년들이 모였다. 창작집단 도르리의 영상기록 상영회 ‘화수재담’ 상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창작집단 도르리는 공부방에 다니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노동자가 되고, 대학생이 되었던 친구들이 모여 만든 작은 창작 모임이다. 창작집단 도르리는 ‘화수재담’이란 이름으로 화수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사진, 영상, 그림, 미니어처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이농한 어머니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기름집을 이어 하는 딸’, ‘화수동 산동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 ‘일꾼교회 목사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화수동은 만석동과 함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은강전기, 은강중공업, 은강방직의 노동자들이 살던 동네다. 그곳에서 자란 청년 예술가들이 과거와 현재의 난장이들을 기록하고 있다. 영상을 보며 ‘난쏘공’이 떠올랐다.

소설 속 영희가 일하던 은강방직, 은강전기는 이제 빈 공장으로 남아 있지만, 영수가 일하던 자동차회사는 주인이 바뀐 채 여전히 가동 중이다. 영희의 어머니가 만조 때마다 떠오른 껍질나무를 건져 올리던 저목장은 이미 20년 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와 주변의 낡은 빌라에는 중년의 가난한 노동자 가족과 우리나라보다 춥거나 더운 나라에서 온 이국의 여성들이 가족을 이루고 노동자로 살아간다. 풍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은 난장이들의 동네다.

내가 ‘난쏘공’을 읽은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조세희 선생님은 ‘난쏘공’이 100만부가 팔리고 여전히 그 책이 읽히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셨다고 했다. 25살에 만석동에 들어가 공부방을 열고 나서, 그곳이 영희네 삼 남매가 일하던 기계 도시 은강인 것을 알았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97년, 그 기계도시 은강을 다시 찾은 조세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제가 고등학교 때 ‘난쏘공’을 읽고 이렇게 살고 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제가 몹쓸 짓을 했네요.”

그러나 나는 ‘난쏘공’이 열어 준 길이 마음에 들었다.

1999년 IMF(외환위기) 사태로 기계도시 은강은 더 가난해지고, 더는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이웃이 좌절해 세상을 떠났다. 절망 속에서 생각했다. 세상을 향해 은강의 가난을 말하지 않으면,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썼다. 그리고 20년 뒤, 2015년에는 만석동에서 있었던 재개발 이야기를 썼다. 2015년에도 계속되는 행복동과 같은, 그러면서도 달라진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다. ‘곁에 있다는 것’은 2015년의 난장이 가족 이야기였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11월 8일, 몽골 청년 푸렙체렝타이왕 아니 한국인 청년 ‘강태완’의 산재 사망 사고 기사를 읽었다.

12월 5일 지는 해를 등지고 기러기들이 김제 벌판으로 끼룩거리며 내려앉았다. 그곳에 지평선이란 아름다운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농공단지가 있었다. 그 단지 안에 있는 ‘HR E&I’ 본사를 찾아갔다. 비까지 내려 스산하기 짝이 없는 늦은 오후, 강태완의 영정을 든 어머니와 함께 촛불을 들었다. 내가 그곳에 간 까닭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는, 그저 몇 년 동안 기사로만 만나 온 강태완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11월 8일 사망한 뒤, 한 달이 다 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강태완과 그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어머니는 2024년의 난장이 가족이었다. 강태완을 비롯한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민 모두가 이 시대의 난장이 가족이다. 정부는 인구 소멸위기 지역에 있는 농공단지에 취업이나 창업하는 이주민들에게 ‘지역특화형 비자F2R’를 준다. 그곳에서 5년을 일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 강태완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서 수백㎞ 떨어진 김제까지 왔다. 그러나 강태완의 희망은 거기서 멈췄다. 그러나 또 다른 강태완의 희망은 그렇게 스러지면 안 되겠기에 이 시대의 난장이 가족을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추모제를 하며 이문영 한겨레 기자가 조세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발견한 작업 노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세희 선생님은 내게 그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난쏘공’은 여전히 내게 길이다.

/김중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