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케이트 너머 전경과 강경 대치하면서 머리에 빨간색 띠를 두른 채 두 눈을 부릅뜨고 팔뚝질하는 학생과 노동자들. 90년대생 기자가 다큐멘터리와 영화·드라마로 처음 접한 집회·시위는 비장함과 두려움이 섞여 있는 투쟁이었다. 민주노총 집회 현장에 가면 웅장한 무대와 엄숙한 분위기에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한다.
민주노총 인천본부가 지난 9일 저녁 인천에서 주최해 연 윤석열 대통령 퇴진 집회는 달랐다. 현장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민중가요가 아닌 로제·브루노마스의 ‘아파트’와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였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도 빼놓지 않고 나왔다. 도로를 가득 메운 집회 참가자들은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힘을 모았다. 세대통합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집회 문화가 변화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기자의 기억으로는 12·3 비상 계엄령 사태가 발생한 바로 다음 날이 그 시점이었다. SNS를 모니터링 하다 웃음을 자아내는 한 영상을 봤다. 국회로 모인 수많은 인파 속, 망치 모양을 한 녹색 빛의 아이돌 응원봉 하나가 ‘쌩뚱맞게’ 자리하고 있는 걸 포착한 영상이었다. 과거의 촛불 집회에선 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모습에 “센스 넘치고 웃기다”면서 곧바로 단톡방에 ‘공유하기’를 눌렀다.
이 영상은 하나의 나비효과가 돼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촛불집회에는 촛불만 들고 가야 한다는 통념이 깨졌다. 집회 진입장벽은 크게 낮아졌다. ‘아이돌 응원봉’이라는 존재에 공감대를 이룬 10·20대 젊은 여성들이 집회 현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9일 인천 집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만난 10대 학생들은 저마다 응원봉을 손에 쥔 채 누구보다도 먼저 집회 현장에 나와 ‘1열 사수’에 나서고 있었다. 콘서트와 공연을 다니던 짬이 집회에서 발휘된다는 말도 있었다.
응원하는 가수가 없는 이들은 무드등이나 트리 전구 등 불빛을 내는 무언가로 각양각색의 집회 도구를 손수 만들어 왔다. 웃음이 함께하는 집회라니. 과거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SNS를 중심으로 젊은 층의 집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선결제 문화’도 새롭게 등장했다.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집회장소 인근 카페나 식당에 선결제를 해두고 SNS에 글을 올린다. 집회 참가자라면 누구든 받아 가라고 말이다.
집회의 형태는 과거와 달라졌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느끼는 분노의 정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겉은 평화롭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시민 한 명 한 명 모두가 윤 대통령의 비상 계엄령 그리고 탄핵소추안 표결 불성립에 매우 격분하고 있었다. 열불이 나서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시민도, 헬리콥터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두근댄다는 시민도 있었다.
이번 집회는 단순한 분노와 저항의 개념을 넘어섰다.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과 의지는 그만큼 강력하다. 이날 집회에 모인 이들은 목 놓아 외쳤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탄핵하라. 탄핵하라”
/유진주기자 yoopear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