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빗 일대기 다룬 ‘사일런트 스카이’
하늘과 별·우주와 인간 위대함 담겨
자기 경험 한계 넘어 초월의 삶 살며
상상력 끈 놓지 않고 끈질기게 추적
우주등대로 불리는 ‘레빗의 법칙’ 남겨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로렌 군더슨 작, 김민정 연출, 11월29일~12월28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는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는 하늘과 별과 우주와 인간이 있다. 그리고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가 여자들이 작업하는 공간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싶었던 레빗을 기다린 것은 망원경이 아니라 사진건판이었다. 레빗은 하버드 대학 천문대에서 사진건판에 나타난 항성들의 밝기를 확인하고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다. 별을 세는 계산원이 모두 여성인 이유는 낮은 임금 때문이었다. 다른 여성 계산원처럼 레빗은 별을 세는 단조로운 일을 맡았다. 하지만 천문학의 바느질이라 불리는 이 일을 반복하면서도 별과 우주에 대한 탐구의 열망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가? 아직 우리은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던 시절에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레빗이 던진 물음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천문학적으로.”
“하늘의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단지 별을 세는 값싼 계산원이 아니었다. 애니 캐넌이 만든 하버드 항성 분류법이 그 사례이다. 이에 자극받은 레빗은 마젤란 은하의 변광성을 관측했다. 변광성은 일정한 간격으로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별을 말한다. 마젤란 은하에서 발견한 1천777개의 변광성에서 레빗은 밝기가 더 긴 주기로 천천히 깜박일수록 밝기가 더 밝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변광 주기가 더 긴 별은 더 밝고, 변광 주기가 짧은 별은 더 어둡다. 이제 별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우리은하 너머에 있는 우주를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바로 허블의 증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정말 밝고 빛나는 건지 아니면 단지 가까이 있을 뿐인지.” 별의 맥동에서 패턴을 읽어낸 레빗의 발견으로 이제 우리는 안다. 어떤 별이 더 밝은 별인지, 아니면 단지 가까이 있어서 밝은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말이다. 밝기로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된 결과이다. 인류가 지구 중심의 세계에서 태양 중심의 세계로 그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 필요했다면, 우리은하가 우주의 전체라는 닫힌 상상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레빗의 발견을 필요로 했다. “변광성 중 밝은 별이 더 긴 주기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는 메모는 훗날 레빗의 법칙(Leavitt’s Law)으로 불리게 된다. 우주의 크기를 측정한 최초의 인물에게 표하는 경의의 이름일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허블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헨리에타 레빗이 우주의 크기를 결정할 수 있는 열쇠를 만들어냈다면, 나는 그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뒤이어 그 열쇠가 돌아가게끔 하는 관측 사실을 제공했다.” 허블에게 레빗이 얼마나 큰 영감을 주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찍이 레빗도 그렇게 말했다. 레빗이 앞선 거인의 어깨 위에서 하늘을 본 것처럼, 허블은 레빗의 어깨 위에서 우주를 본 것이다.
“하늘은 성별을 가리지 않으니까.” 레빗의 발견이 위대한 까닭은 자기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레빗이 여성이라서 더 위대한 것은 아니다. 청력을 잃어가면서도 하늘의 별을 관찰하였다. 나아가 우주의 크기를 물었다. 계산원으로만 존재하던 여성의 역할에 갇히지 않으면서 우주에 관한 상상력의 끈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주의 등대로 불리는 레빗의 법칙을 남겼다.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하늘의 규칙을 따랐다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
레빗의 발견을 기초로 삼아 우리는 우리은하를 넘어 또 다른 은하를 만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지구와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소중함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라는 칼 세이건의 말처럼 말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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