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견제에 약이 올라 비상계엄 발동
무소불위 탄핵소추권, 무정부 만들 수도
패권자들 복수혈전 정치에 헌법은 무력
尹·李 추락 두고 편 갈라 부역할때 아니다
‘탄핵 심판’과 ‘선거법 판결’. 두 마리의 황소가 동시에 케이지를 박차고 나가 기수를 떨어트리려 몸부림친다. 150분 비상계엄으로 펼쳐진 블랙 코미디 정국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선 불가능한 정국이니, 우리에겐 참혹한 비극인데 민주우방에겐 난해한 조롱거리다.
국민이 믿었던 헌법이 국민과 나라를 위기에 빠트렸다. 대통령은 헌법의 국정 최고기관이자 헌법의 수호자다.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해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을 상상한 국민은 없었다. 그걸 윤석열 대통령이 해냈다. 국회를 장악한 거대 야당의 자유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한 경고용 계엄이란다. 야당의 무한 견제에 약이 올라 비상계엄을 발동했다는 얘기다. 천만다행으로 국회가 극적으로 비상계엄을 막아냈다. 하지만 비정상 대통령의 통치에 취약한 헌법의 맹점은 그대로 남았다.
다수 야당이 마음만 먹으면 무정부 상태를 만들 수 있다. 무소불위의 탄핵소추권이다. 151명의 과반수 정당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공직자를 탄핵소추해 헌재 심판 때까지 직무를 정지시킬 수 있다. 국무총리, 장관, 판·검사, 헌법재판관, 감사원장, 모든 임명직 공직자가 대상이다. 200명이면 대통령 직무정지까지 가능하다. 과반 정당이 정략적 이익을 위해 정부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리가 헌법에 명시돼있다. 지금 감사원, 서울중앙지검, 방통위원회가 수장들의 탄핵소추로 절름발이가 됐다.
9차 개헌으로 확정된 현행 헌법은 87체제를 출범시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권리장전이다. 5년 단임 대통령과 국회가 견제와 협력으로 민주 국가를 유지하고 사법부는 독립적으로 이를 지원하도록 했다. 최소한의 도덕과 예의를 갖추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의 정치가 가능했던 시대에, 그런 정치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란 확신을 전제해 개헌한 헌법이다.
정치가 변했다. 목숨 걸고 싸웠지만 상대의 업적은 인정하면서 87년 개헌에 합의했던 보수와 진보의 가치와 이념은 국가와 국민을 지향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사람 따라 87체제의 정신과 향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악질적인 권력의지만 남았다. 정치가 탁해지면서 헌법도 무력해졌다. 도덕도 예의도 없이 진영의 사투리에 갇혀 말이 안 통하는 정적들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해 국가와 국민에게 최악의 재난을 일으킨 지경에 이르렀다. 87년 헌법이 상상할 수 없었던 최악의 부작용이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은 주 위열왕의 통치를 개탄하면서 시작한다. 위열왕은 제후국인 진나라를 무력으로 할거한 세 가문을 벌하는 대신 제후로 책봉했다. 이후 무력으로 국권을 할거한 제후들이 주 왕실을 능멸하면서 패권전쟁에 몰두해 춘추전국의 난세가 열렸다. 통치 질서가 무너져 발생한 비극이다. 국가와 국민은 헌법의 유일한 주체다. 삼권은 주체의 보전에 협력해야 할 수단이다. 정부와 국회가 적대하고 사법이 권력 따라 춤추면, 수단이 주체를 전복한다. 그것이 가능한 헌법은 국가와 국민을 지킬 수 없다.
87헌법은 패권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복수혈전 정치에 과분해 무력하다. 바꾸지 않으면 헌법의 목적인 국가와 국민을 지킬 수 없다. 단임 대통령제를 고쳐야 한다. 무능한 정권의 임기를 보장하고 유능한 정권의 연임을 제한한다. 이원집정부제, 내각책임제, 대통령 중임제 등 국가와 국민에 이익인 제도를 선택해야 한다. 계엄군의 국회 진입 금지를 명시해 비정상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를 군·경이 명예롭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 탄핵소추권을 신설해 국민의 선거권을 침해한 자들을 국회에서 축출해야 한다. 국정최고책임자 유고시 권한대행직과 직무를 확정해 국정 단절을 막아야 한다.
8년 전 12월 박근혜 탄핵정국 때 데스크칼럼에서 같은 주장을 했었다. 그때 미룬 탓에 재발된 탄핵정국이다. 두 마리 황소에 올라탄 윤석열과 이재명 중 누가 먼저 추락할지를 두고 편 갈라 패권정치에 부역할 때가 아니다. 헌법이 그대로면 헌법적 패권주의자와 비정상 정치인들의 위헌적 정치를 해소할 수 없다. 개헌 말고는 답이 없는 한국 정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