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기자, 그중에서도 특히 ‘펜 기자’는 나르시시즘이 짙게 드러나는 직업이다. 소설가 한강을 인터뷰한다고 쳐보자. 만약 카메라를 한강이 아닌 기자 얼굴 위주로 비춘다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릴 게 뻔하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기자의 주관을 비중 있게 풀어내는 게 가능하다. 능력만 좋다면, 그리고 욕심 많은 기자라면 “ ” 이런 큰따옴표로 리드를 시작하지 않고도 매력적인 기사를 쓸 수 있다. 표면적인 주인공은 인터뷰이지만 실제 주도권을 쥔 사람은 인터뷰어라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펜 기자의 특권 아닌 특권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튀고 싶은 욕망을 겸허히 내려놓게 하는 인터뷰이들이 있다. 성취가 엄청나거나, 이름이 대단해서도 아니다. 소소한 답변 속에 거꾸로 기자 본연의 역할을 되새기게 하는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뇌가 상쾌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행운이라면 행운이랄까. 최근 그런 인터뷰이를 만났다. 그가 내게 전해준 ‘불편함’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의 본질이었다. 문화부 기자는 ‘예쁨’을 보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쫓아다니는 일을 한다. 어떤 작품이 한 개인에게 변화를 일으킬 때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답다는 건 사회적인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난 어떤 고상한 이야기만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사회 운동가, 정치인, 재계 인사의 말은 곧바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예술가의 언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예술가의 언어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하자면 효력 없을지라도 부단히 ‘박력 있게 스파이크’를 던지는 행위다. 이는 주먹, 법, 자본보다 강력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지는 건 당연히 계란일 테지만 계속 계란을 던지다 보면 바위는 노랗게 물든다. 그런 흔적을 묵묵히 남기는 행위. 그건 분명 예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다.

덧붙이자면 ‘박력 있게 스파이크’는 나의 인터뷰이, 이준아가 쓴 단편소설 제목이다.

/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