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없는 서러움, 현실서도 그럴까
오백 나한상 190개나 발견한 김병호
“세계 유물이라더니 郡 내 요구 무시”
학술대회서도 내빈 소개조차 없어
‘작은 배려’ 그리도 어려운가 의문
영화 ‘더 디그(The Dig)’를 보면서 무명은 다 서럽다는 생각을 했다. 학력이 없다는 이유로 고고학자라 불리지도 못하고 자신이 찾아낸 엄청난 발굴에서도 배제되는 주인공. 다행히 미망인의 배려로 훗날 역사에 남겨지게 되는데, 현실에서도 그럴까?
몇 년 전 아는 분의 안내로 강원도 영월의 창령사지를 찾은 적이 있다. 춘천박물관에서 ‘창령사지 오백 나한상’의 전시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던 필자는 당연히 발굴 현장도 보고 싶었다. 꼬불꼬불한 외길을 올라 가파른 고지에 위치한 창령사지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발견자 김병호 선생의 얼굴 주름이었다.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을 때 생기는 그 주름은 나한상 발견 후 그가 겪은 고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같이 간 일행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말을 청하자 그는 “얘기할수록 서글퍼져서 말이 안 나와요”하면서 울먹였다.
2001년과 2002년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 나한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학자나 박물관 관계자, 공무원 등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갔다. “현장조사를 할 때 학자 30명을 포함해 120명이나 왔지만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거나 “나한상이 강원도를 대표한다고 하고 전국에서 순회전을 하며, 세계에도 내세울 만한 유물이라고 하면서 나 몰라라 한다”고 했다(2022년 호주에서 6개월간 전시를 했을 때 1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고, 그해 호주에서 열린 전시 중 가장 좋은 전시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곳에는 지금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전기를 놔달라는 게 그의 첫번째 요구, 그리고 당초 군에서 약속했던 요사채를 지어달라는 것이 두번째 요구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대명천지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니, 좀 심하지 않은가! 또 요사채를 지어준다고 하던 때 낙산사에 불이 나서 자금이 그곳에 투입되었고 이후 논의조차 없는 상태다.
오백 나한상은 지금까지 317구가 발견됐는데 이중 190개를 그가 찾아냈다. 문화재청이 그에게 준 보상금은 총 6백몇십만원. 법을 내세우며 불상을 빼앗아가는 문화재청에 “사람이 먼저지 법이 먼저냐? 문화재청 옆방을 달라, 거기 가서 불상과 함께 살겠다”며 저항했던 그는 나한상에 대한 세상의 찬탄이 쏟아질수록 점점 더 박탈감을 느껴갔다.
필자 일행이 “응어리가 많으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보시라”고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기한테 진심으로 말을 걸어주었다고 고마워했다.
필자는 그가 왜 그렇게 상처를 받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2022년 ‘창령사지 오백 나한, 강원을 넘어선 한국의 얼굴’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기대를 안고 영월에서 춘천으로 날아갔다. 나한상을 아끼는 전문가들이 온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새롭게 찾아낸 불상도 보여준다고 잘 싸서 가지고 갔다. 그러나 그는 내빈을 소개할 때 호명받지도 못했다. 다들 ‘나 전문가임네’하는 도도함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날 필자는 마지막에 질문 기회를 얻어 이렇게 말했다. “여기 김병호 선생을 아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소개조차 안 시키는 게 이상하다. 선생은 나한상 문제에 분노, 울분, 화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그 양반이 돈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배려에 굶주린 분이다. 사소한 거지만 조금만 마음을 써주면 될 일인데 그것조차 안 하는 게 안타깝다.”
김병호 선생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앉아 있다가 “지들이 내가 발견하지 않았으면 무슨 행사를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중간에 나가버렸다.
나한상이 그에게 호사다마였을까?
필자: “나한상을 발견한 걸 후회하세요?”
김병호: “뭘 후회해요?”
필자: “정말 후회 안 하세요?”
김병호: “후회 안 해요. 영월에서 출토되어 전 세계의 관람객을 울리고 있으니 후회는 없죠.”
/김예옥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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