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위헌적 계엄 선포로 독재 획책
한결같이 일방적인 위계질서 추구
발전 국가일수록 대화·타협 도모
서열질 타파·민주주의 번영 기여
사회 약자들 투쟁없이 권리 실현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에 선정되고 4일 뒤 노벨경제학상에는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 3명의 경제학자가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한강 작가는 인간과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을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고 고유의 아름다운 문체로 녹여내었는데, 경제학자 3인도 문학가와 결을 같이한다. 이들은 착취적 제도와 포용적 제도를 분류하고, 종종 권력에 의한 폭력이 수반되는 착취적 제도가 개인 및 국가의 번영을 해치는 주원인임을 엄밀한 실증분석으로 풀어냈다. 2024년 문학과 경제학의 대가로 선정된 이들은 역대 가장 무능한 대통령 윤석열의 실패한 친위 쿠데타를 사전에 질책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다. 2021년 윤석열이 인생책으로 꼽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공저자가 바로 이들 수상자라는 점에서 실소가 절로 나온다.
아제모을루 등은 법률이나 관행처럼 공식적, 비공식적 여러 규칙을 제도로 규정한다. 이들이 말하는 착취적 제도와 이를 악화시키는 것들에는 독재와 같은 폭정을 비롯해 사유재산이 보장되지 않거나 소수에 집중되는 것, 불공정한 사법체제 및 경쟁, 직업선택 및 기업활동의 자유 억압, 기회의 독점, 노동 및 성과에 대한 보상 부족 그리고 사회 기반시설이나 교육 등 각종 공공서비스의 불충분한 공급 등이 포함된다. 포용적 제도란 민주주의, 질 좋은 공공서비스, 기회의 확산 등 그 반대의 사례들이다. 완전히 포용적이거나 착취적인 나라는 없지만 포용적 제도가 잘 갖춰질 때 더 크고 고르게 번영한다는 점을 이들은 강조한다.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은 위헌적 계엄을 통해 착취적 제도의 전형 중 하나인 독재를 획책했다. 하도 무능해서 빠르게 실패했기에 망정이지 우리의 아픈 역사가 노벨문학상이 아닌 현실 한복판에서 재현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가 대선후보로 옹립될 때 많은 언론이 ‘강골 검사’로 치켜세웠지만 실은 ‘내 맘대로 하겠다’는 반민주적 인물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제 와서 언론은 습관성 격노를 지적하고 대화와 타협 없는 국정운영이 파국을 맞았다고 비판하지만, 후보 시절의 권위주의적 언행을 미화하거나 이에 대한 보도를 소홀히 한 것은 깊이 성찰할 지점이다.
대화와 타협은 민주주의의 요체이고 민주주의가 잘되는 나라는 노벨상이 말하는 포용적 제도가 발달한 것이다. 말이 쉽지 대화와 타협은 원만히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고 협잡이나 야합으로 귀결되기도 하며 미미한 개선의 시늉에 그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하지 않는다면 윤석열이 잘 보여주듯 그로 인해 초래될 피해가 너무 크기에 가장 번영한 국가일수록 집요하게 대화와 타협을 도모한다. 내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그 이상의 민주적 번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윤석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제는 다들 알다시피 그는 서열의식에 찌든 반(자유)민주주의자이다. 일상의 안하무인적 태도부터 정책결정 과정과 위헌적 계엄에 이르기까지 일방적 위계질서를 한결같이 추구한다. 이런 군상은 당연하게도 민주주의적 대화와 타협에 질색한다. 대화와 타협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뿌리 깊은 ‘온갖 서열질’을 타파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통한 번영에 기여함은 물론 그 자체로 삶의 어려움을 크게 덜어줄 것이다.
나아가 대화와 타협을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의대증원 사태에서 보듯 적잖은 의사들이 윤석열 같은 검사들에 견줄 만한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대화와 타협을 거부할 시 설득할 방도도 없다. 이를 방비하려면 대화와 타협은 숨쉬듯 ‘으레 하는 일’이란 인식이 체화돼야 한다. 민주주의, 곧 대화와 타협이 비단 정치뿐 아니라 일상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약자들이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20일 넘게 단식농성을 해도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하청노동자, 1년 가까이 옥상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등 여전히 대화와 타협으로부터 배제되어 ‘입틀막’ 당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수많은 사회 약자가 극한투쟁 없이도 대화와 타협의 권리를 실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윤석열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바로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제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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