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소설가
김경은 소설가

공장 다니던 여성들 K-Pop 아이돌 덕질하며 대학에 다니게 됐지만 변화를 꿈꾸던 윗세대의 DNA를 각인하고 있었다.

시대착오적 계엄령 선포하는 권력자 맞서 병들어가는 사회를 회생시키려, 역사의 흐름 되돌리려 빛을 들고 거리로 나와 희망을 전파한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는 조세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2주기 되는 날이다. 온 국민의 필독서였던 선생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장이’는 표기의 바르고 틀리고를 떠나 약자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다. 또 영희로 대표되는 여성 서사는 한국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면서 응원봉을 들고 윤석열 탄핵 집회에 쏟아져나온 이삼십대 여성으로 이어진다.

이들 젊은 여성의 행동은 우리 역사에 면면히 이어진 ‘바리데기’ 서사의 연장선이다. 바리데기 신화에서 아들 없는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바리데기는 버려진다. 정작 바리데기는 병든 아버지를 살리려고 서천서역국에 들어가 집안일, 밭일, 온갖 허드렛일을 해주며 아들까지 낳아준 뒤 약수를 얻어와 아버지를 살린다. 뉘우친 아버지 오귀대왕은 아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하지만 바리데기는 이를 마다하고 신들의 왕으로 좌정한다. 영희 역시 돌아왔을 때 부당한 사측에 맞서 싸우며 사회적 생명을 얻는다.

집을 내어주고 얻은 입주권이 팔린 날 영희는 사라졌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는 굴뚝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렸고 3년 전 왔던 꼽추를 엊그제 온 것으로 착각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한데다 집까지 잃은 아버지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이삿날은 다가오는데 아버지와 영희가 동시에 사라져 가족들은 발을 구르며 찾아다닌다. 영희가 우주인에게 납치됐다는 술주정뱅이의 말이 사실인지 지켜보기 위해 영호는 방죽 풀숲에서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영희는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입주권을 찾겠다고 부동산 브로커를 따라나섰다. 재벌 2세인 그의 아파트에서 성 노리개가 되어 약물에 취해 지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회를 엿봐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입주권을 되찾는다.

새벽에 영동대로를 넘는 영희는 머리에 팬지꽃을 꽂고 줄 끊어진 기타를 치던 울보가 더는 아니었다. 가족들과 은강시로 이사한 뒤 교회에 다니며 노동자의 권리를 깨우쳤을뿐더러 행동에 미온적인 큰오빠 영수까지 일깨운다.

영희가 취업한 ‘은강방직’은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을 말하며 동일방직은 유신독재 시절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노동조합 지부장이 선출된 곳이다. 당시 도시산업선교회는 활동가들을 인천의 공장에 취업시켜 권리를 자각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 가운데서도 동일방직은 대표 사례였다. 차기 노조 집행부를 선출하던 날 이를 방해하려 사측의 구사대가 투입돼 똥물을 투척한 사건은 유명하다. 폭력에 맞서 싸우던 이들 여성은 집안을 책임지던 실질적 가장이었다. 월급날이면 블록 하나 건너 있던 만석우체국에는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부치려 노동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은 집안의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올라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가부장 사회에서 버려진 바리데기였으며, 사회 모순을 깨우치고 노조활동에 나서 변화를 꿈꾸며 사회적 생명을 얻는다.

‘난쏘공’은 유신독재 시대, 거대 악과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지만 무기력하게 당하는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가 등장하는 ‘프롤로그’에서는 탈무드의 이야기를 뒤집고 세상의 법칙을 비판한다. 같이 굴뚝을 청소하는데 한 소년만 얼굴이 깨끗할 수 없다며 전제를 뒤엎는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폭력을 구분하는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앉은뱅이와 꼽추가 폭력으로 자신들의 입주권을 되찾는 이야기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칼날’에서는 배관 수리업자한테 쫓기며 일을 하는 난장이가 얼마나 정직하면서도 능력이 있는 기술자인지를 이야기한다.

선생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대세에서는 밀리지만 차곡차곡 승리를 쌓아간다. 비록 거주지에서 쫓겨났지만 당하고만 있지 않은 ‘영희와 영희들’을 그려내 희망을 말했다. 사회가 변하고 공장에 다니던 젊은 여성들은 K-Pop 아이돌을 덕질하며 대학에 다니게 됐지만 변화를 꿈꾸던 윗세대의 DNA를 각인하고 있었다. 돌보는 마음으로 스타를 덕질했고 시대착오적 계엄령을 선포하는 권력자에 맞서 병들어가는 사회를 회생시키려,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 빛을 들고 거리로 나와 그들의 흥을, 희망을 전파하고 있다.

/김경은 소설가